<생활감성 에세이, 애도 에세이, 살아남은 한 인간으로서의 연대기>
지난주부터 오정희 선생님의 <유년의 뜰>을 읽고 있다.
오정희 선생님의 문체가 훌륭하단 얘기는 귀동냥으로 알았다. 과연 그러했다.
내 편협하고 늘어지는 독서구력 안에서 나름 압도적인 느낌을 받은 작가는 여럿인데,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옛날의 경험이긴 해도 국내에선 김승옥을 이길 작가는 없다. 소설을 읽어가며 익숙한 냄새인 듯 김승옥 선생님의 향기를 맡았다. 내가 단지 김승옥 선생님의 책을 먼저 접해서이다.
문장의 강도는 내밀함과 꼼꼼함을 치정처럼 지녔다. 성실하며 현실적이며 헌신적인, 치밀한 미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 문장 하나 허투루 지나칠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훌륭한 작품집이라 집중해 읽어나갔고, 압도적인 작품성의 작품들을 계속해서 지나가자 어느 순간 집중력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읽는 데 상당한 힘을 요하는 문장들이었다. 모르는 단어도 많았고, 시대상은 완전히 달랐다. 좋다 보니 더욱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강했다. 뒤로 갈수록 비슷한 주제의식이 반복되다 보니, 약간은 멍해진 듯했다.
문득 소가 풀이 아닌 종이를 씹듯, 무감각한 상태로 글 아닌 글자를 읽고 있었다. 어찌어찌 끝에서 두 번째 작품인 <별사別辭>에 달했다. 오간 데 없던 성성하고 묵직한 성찰이 다시금 골 안으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훌륭하다.’
중반쯤부터 고루함으로 나를 속여 내 감상을 한쪽으로 내밀던 작품집이 나를 다시 작품의 중력 안으로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상으로 이 책을 SNS에 추천하는 일은 보류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마음 한편으로 책을 밀어내던 와중이었다. ‘나 자신에게 좋으면 그만이지’라는 씁쓸한 생각이었다. <별사> 때문에 도저히 그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일까. 나는 어느 순간, 모든 집중력을 놓쳤다.
이 모든 감각을 되돌리는 법은 간단하다. ‘처음’부터 다시 읽는 것이다. 독서를 빠르게 하는 편이 아니라 다시 읽어야 할 분량이 내 기준 만만치 않았고,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중간에 집중력을 잃어버렸던 글*을 또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한다는 게 겁났지만, 별로인 것은 별로인 대로 다시 깊게 이해해야 했다. 그래야 누구에게든, 무엇이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쪽메모한 모든 것을 지웠다.
물론 짧으면서도 깊은 망설임의 늪을 건넜다. 세월 좋게 책을 읽을 만한 형편이 결코 아니라, 지금까지 이 책에 투여한 시간과 앞으로 읽어야 할 더 많은, 무수한, 가없는, 책들에 투여해야 할 시간‘들’의 팽팽한 힘겨루기가 전략적 사고를 지배했다. 나는 내가 고른 책과 그 책을 읽는 시간이라는 나의 선택들을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온전히 이해하거나 사랑하지 않았다. 소설가가 글쓰기에 투여한 시간과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사투하고 관찰하며 그려냈을 살내음의 현장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되레 겉핥기식 독서로 묵살했다. 진짜 독서가 아니었다.
이 책 1권을 빨리 읽고 지나치는 일이 그 무슨 명예인들 되겠으랴. 이 책뿐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삶에 쫓겨 내가 한 것은 ‘독서’가 아닌 그저 ‘읽기’를 위해 읽어나간 사투, 다음 책을 읽어나가기 위해 밟아야 하는 중간 종착점이자 뜀뛰기 발판에 불과했다. 나는 <유년의 뜰>의 주인공들이 자신이 건너온 과거의 한 지점을 영원처럼 돌아보듯 내 삶을 파노라마로 보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읽는가.”
다시 정립해야 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읽는가.”
첫째는, 나 자신을 위해서이다.
내가 복무해야 할 삶의 정서나 세계를 깊게 이해하고, 배우고, 나를 위로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타인을 위해서이다.
좋은 글과 이야기, 나름의 기준으로 선별한 좋은 책들을 나의 담론과 제대로 된 가치로 소개하며 그게 그들의 삶에도 나름의 의미나 위로가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셋째는, 작가와 작품을 위해서이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명의 사람에게라도 더 알려지는 것, 예술가와 작품이 복무해야 할 최종 목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읽어야 했다.
술술 읽히는 편한 글이 아니고**, 시대상도 지금과는 멀어 읽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나는 이 책을 처음 접한 경이의 순간으로 나를 온전히 되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의 모든 독서가 이와 같은 성적 내기 식으로 그릇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시 돌아가야 했다.
회사에 다닐 때는 마음과 몸이 바빠 원하는 만큼 독서하기 힘들었고, 집에서 쉴 때는 쉬는 이의 갈급한 마음, 여남은 날에 대한 장대한 계획과 타이머를 설정해 놓은 듯 흐르는 휴일의 시간에 대한 아쉬움으로 제대로 독서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이 변명에서도 느끼듯, 사실 제대로 된 독서는 ‘언제나’ 가능하다. 진짜 문제는 앞으로 읽어야 할, 읽고 싶은 수많은 책에 대한 가상 목마름이다. 물량이 쏟아지는 데 내 창고에는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상심이다. 지금 읽는 책 앞에서도 그다음 책을 읽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그리워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더더욱이 중요한 건 물량이 아니다.
기계 앞에 선 노동자처럼 책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많이 하는 것’이 아닌, ‘잘 읽는 것’.
다시 시작할 것이다.
지금뿐만이 아니다.
앞으로도 <유년의 뜰> 속 문장이 소설 속 인물들을 치열하게 묘사함으로써 바치는 삶의 헌신처럼, 그 인물들의 삶이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주시하는 치밀하고 꼼꼼한 과거의 경험처럼, 느려도 좋으니 함께 제대로 추억하며, 복기하며 읽어갈 것이다. 그다음에 책장을 덮고 바로 잊어버리는 것은 나의 소관이 아닐 것이다.
* 여기에 살짝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덧붙인다. 사실, 나는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집중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다. 나는 자주, 책을 읽다 힘겨워하고, 길을 잃고, 잠에 빠져든다. 솔직히 나는 “잠이 오지 않을 땐 책을 읽으라”는 말에 가히 동감한다. 독서의 역설이지만, 또 그만한 독서의 편안한 효용이 어디 있겠는가.
** 어려워서가 아니다. 치밀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