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감성 에세이, 애도 에세이, 살아남은 한 인간으로서의 연대기>
책을 사랑하는 사람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책장에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이 훨씬 많다. 방의 규모에 비해 책이 지나치게 많아 하나하나 읽어가는 중에, 아주 어릴 때 읽은 어린이만화 <올리버 트위스트>를 단순히 버리기 위해 다시 읽었다. 이 책을 어릴 적 읽었던 이후로 여태 방에 남겨둔 이유는 딱 하나일 것이다. 꽤 재밌게 읽었다는 어렴풋한 그 ‘느낌’.
그러므로 버리기 위해 읽은 이유도 분명하다.
지금 내 나이에 어린이 버전 <올리버 트위스트>의 그림과 내용이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와 끝내 소장욕을 자극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버리기 전 예우 차, 한 번 읽기로 했다.
큰 줄기 외엔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 새롭기도 했지만, 사실 지극히 뻔한 내용이었다. 요약본으로 본편도 아니지만, 책의 말미로 갈수록 점점 버리기 위해 책을 펼쳐든 나의 당위가 입증되는 느낌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심상을 열어주는 훌륭한 어린이책도 많지만, 교훈을 주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설정을 넣거나, 과도하게 비약적인 전개로 정해놓은 결론을 제시하는 것을 과업 삼는 어린이책도 적지 않다.
이 어린이책 역시 축약 버전이라 해도 착한 아이로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도 주면서, 교훈이라는 목표로 달려가는 데 따라 생기는 어린이책의 한계, 스토리나 캐릭터상의 비약도 보였다. 물론 어린이의 눈에 그것이 흠으로 보일 리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어린이책들 역시 메시지를 담더라도 스토리 전개가 더 세련되고, 어른 시장에 내놓아도 좋을 정도로 냉정하게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교훈을 위한 교훈을 제시하기 위해 끝으로 열심히 달려온 것 같은 어린이책의 마지막 장을 보며 당황한 경우도 많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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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고아원에서 부모 없이 자란 올리버 트위스트가 나쁜 환경에 노출돼 도둑질에도 연루되고, 악당들의 계략과 횡포에 시달리고, 이유 없이 구박과 미움도 받지만, 자신의 양심과 곧은 성품을 잃지 않아 결국 선량한 어른이 존재하는 안정적인 환경의 가정을 만나 사랑받는 이야기다.
어린이책의 기발한 상상력이 그러하듯이, 이 책의 끝부분에도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어 보는 몇 가지 질문이 수록되어 있다. 무려 7가지 질문 중, 6번째 질문은 이것이었다.
◆ 질문 6: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고 브라운로 씨의 양자가 되어 행복한 생활을 하기까지, 올리버는 여러 번의 위험한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올리버가 가장 잊을 수 없었던 은인은 누구일까요?
정답이 문제에 포함될 리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뒤로하고, 나는 답이 당연히 ‘브라운로’ 씨일 거라고 생각했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올리버를 믿고 지지한 한 사람, 마지막엔 올리버를 양자로까지 받아들인 사람, 올리버를 제하고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고, 존재감이 큰 사람, 제대로 어른인 사람. 바로 ‘브라운로’ 씨였기 때문이다. 문제가 너무 쉬웠다.
그런데, 질문의 귀띔(해설)으로 가보니, 정답이 ‘누구’라고 단적으로 쓰여 있지는 않지만, 이런 힌트가 있었다.
◆ 질문 6에 대한 귀띔:
올리버에게 확실한 도움을 주고, 그 일 때문에 자기 목숨을 희생해야 했던 사람이 있었지요?
이 귀띔을 보고 나는 너무 깜짝 놀랐다.
내가 놀란 건 정말이었다.
이 물음은 등장인물 ‘낸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낸시 역시 올리버와 비슷한 처지로 악의 소굴 안에서 올리버를 지키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늘 바라만 보았는데, 결정적인 순간, 올리버를 위해 자신이 아는 정보를 전달하다 조직원으로부터 맞아 죽었다.
어린이책에서 토의를 위해 만든 질문과 그 힌트라며 들려준 귀띔만이 책을 둘러싼 절대적인 답과 논의의 대상은 아닐지라도, 올리버에게뿐 아니라, 책을 읽은 내게 이 질문 없이도 ‘가장 잊을 수 없는 은인’은 처음부터 마땅히 낸시여야 했다.
물론 브라운로 씨도 훌륭하고 따뜻한 인물이지만, 브라운로 씨는 자신이 가진 성품과 넉넉하다 못해 넘치는 환경의 일부를 올리버에게 제공했다면, 낸시는 자신조차 오갈 데와 보호막이 없는 환경에서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다른 이를 구하기 위해 두려움을 무릅쓴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어쩜 낸시가 죽은 이후로 낸시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낸시의 삶은 그 선택 하나로 소멸되었고, 다른 이들은 여전히 살아남았는 데 말이다.
내게 두려움에 사로잡혀 나쁜 짓을 방관하며 올리버를 일관되게 지키지 못한 낸시는 때론 다른 못된 조직원들과 동등하게 나쁜 사람이었다. 낸시가 마음속에서 어떤 갈등을 겪어왔든, 올리버를 위해 최종적으로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희생을 치렀든, 내게 낸시는 못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은인’을 묻는 6번 질문에서 낸시를 후보 선상에조차 떠올리지 않았다. 낸시는 그 대척점에 있었다. 마치 이야기 속 허다한 클리셰처럼 낸시의 죽음은 내게 합당한 결과였다. 그렇게 되어도 마땅했다. 그래서 아무 임팩트도 없었다. 이전 그녀의 유약한 태도 때문에, 그녀의 죽음도 숭고하거나 고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내가 잘 풀리길 염원하는 인물들의 삶에 집중하느라 그것은 하나의 사건조차 되지 않았다. ‘은인’의 지위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나는 이 질문이 내게 준 충격(삶에서도 이러한 눈속임이 중첩되어왔고, 되리라는 생각) 때문에 죽을 때까지 이 책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그저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강하면서도 온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 두 사람의 환경은 시작부터 달랐다. 그러나 이분법적인 구도 안에서, 환경의 제약을 받으며 살아온 한 인간의 무수한 번뇌와 두려움은 내게 그를 이도 저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었다. 낸시는 약한 자면서 동시에 강한 자였는데 말이다.
그녀는 끝까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결국 올리버를 위해 조직원의 정보를 전했다. 그리고 그 일로, 그 온갖 공포와 제약, 범죄가 들끓는 조악한 환경에서조차 유지해 오던 삶이 마감되었다. 정보를 제공한 낸시가 없었다면 이후 올리버의 삶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낸시처럼 아예 사라졌을 수도 있다. 낸시는 자신은 구원받기 힘든 인생을 살았고, 그것이 반복될지라도 올리버는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걷지 않길 바랐다. 그 일은 사실 자기 자신의 육신이나 마음을 구하려는 용기였다. 그런데 난 그 고귀한 희생을 홀랑 잊어버리고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 충격이 컸던 것은 나의 이 둔감한 시선이 그대로 현실에 투영된다고 생각하는 게 마땅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이 세상의 수많은 ‘낸시’들을 그냥 무심하게 지나쳤거나 때로 잘못된 정보로 그들의 삶을 격하했을 가능성. ‘여태 세상을 살아오면서 내가 낸시처럼 감히 남들은 할 수 없는 고귀한 선택을 하였으나 알아채지 못하거나 달리 바라보고 지나친 인물이 있지는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낸시처럼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데, 그것이 소리 소문 없이 묻히거나 혹은 내 앞에서 내가 내 눈으로 묵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들.
나는 바로 그 ‘현실의 질문’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내 곁에 남겨두며 나는 미약하게나마 다짐했다. 진짜 약한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정말 강한 사람을 식별해 내는 능력을 지니자고. 여태 나는 내게 그 능력이 아주 없지만은 않다고 자만했었다. 하지만 전혀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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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내 음악 앱의 랜덤 플레이리스트에서는 Luther Vandross의 ‘Dance with my father’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사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If I could get another chance (내게 만일 기회가 다시 온다면)
Another walk, another dance with him (아빠와 춤출 수 있는)
지금은 함께할 수 없는 아빠와의 즐거웠고 사랑받던 한때를 회상하는 재즈발라드다. 전근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가정의 권위는 흔히 아버지로 표상되는 가장의 권위에서 나왔다. 이 권위란 ‘경제적’ 권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나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근원적인 부분에서 자신의 존재가 선택받고 합당하게 살아갈 권리를 획득하고 사회로 나오느냐 아니냐의 생각의 빈자리와 몫을 만들었다. 이를테면 가장이 가정 내에서나 사회에서 스스로를 불명예스러운 존재로 격하하거나 격하될 경우, 자식의 존재론적인 영역까지 간섭해 제2의 불명예를 낳기도 하는 식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가시화된 권위라기보다, 유교 등 종교적 엄숙주의 아래에서, 각 개인과 가정의 내부에서 누구보다 그 스스로가 진위를 알아 부여하거나 배제하는 스스로의 권위였다. 자신만 아는 차별적인 사회적 권리고, 부끄러움이지만 그렇기에 한 사람의 평생을 살리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는 암묵적 권위였다.
장편 <올리버 트위스트>가 영국의 신 빈민구제법을 비롯한 잘못된 사회구조와 관행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 이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가장이 존재하는 가정이라는 권력(힘, 혹은 울타리)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 가정이 제대로 갖춰져야 기초적인 보살핌과 배려를 받기 때문이다. 이는 태생적 가정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 대안적 가정일 수도 있다.
<올리버 트위스트>에 나오는 나쁜 아이들은 대게 어른과 가정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거나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이다. 사회를 어슬렁거리는 나쁜 어른들이 버려진 아이들을 가로채 관리하고, 아이들은 제2의 가정이라는 독가스 같은 사회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향한 반목과 배신을 숨 쉬듯이 반복하며 살아간다. 결코 그런 환경이 나쁜 행실의 변론이 될 수는 없겠지만, “변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찌 되었든 어른(사회)의 보호나 삶의 방향성의 제시, 본보기 없이 스스로를 지키고 살아남아야 하는 환경 속에서 악을 배양하고, 생장시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삶의 책임이자 요인이다. 이들에겐 의지할 만한 아버지와의 추억도, 어머니와의 추억도 없다. 그리고 그곳에 바로 트위스트와 낸시가 있다.
책에 나오는 아이를 포함해 세상 모두에게 그렇듯, 이 둘에게도 가정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이들은 같은 조건에서 다른 아이들과 다른 선택을 했다. 이들이 선택한 일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증오하지 않음’으로써, 타인에게 다른 사랑받을 기회나 권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자신뿐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타인까지도 ‘연민의 시선’으로 보고 더는 훼손되지 않길 바라며 자신의 삶으로써 보호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낸시를 몰라봤지만 책 속의 선택이 낸시를 좀 더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으리라 믿어보려 한다. 물론 낸시의 이야기를 잠깐 접했다는 이유로 내가 낸시에게 한 줌의 의미조차 될 수는 없겠지만, 만약 먼 훗날, 저승이나 꿈에서라도 책 속 등장인물 중 하나와 춤출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드시 낸시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리라. 낸시가 올리버에게 그러했듯, 나도 낸시에게 하나의 작은 가정假定이 되어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