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감성 에세이, 애도 에세이, 살아남은 한 인간으로서의 연대기>
강정- 때로는 누군가의 자살에서 아무런 현실적인 이유도 발견되지 않을 때도 있다. (…) 여러 복합적인 것들이 개인을 옥죄다가 순간적인 압력이 팽창하면서 벌어지는 일일 텐데 누구나 그런 충동은 한두 번쯤 겪어봤을 거다. 하지만 그 단계를 지났을 때 어떤 한계를 통과한 기분이 든다. 사회적인 통과제도가 아닌 자기 자신을 통과하게 되는 거다. (…) 한 개인이 글을 쓴다는 건 여러 가지 사회적 심리적 맥락과 갈등들을 스스로 감내해 내야 하는 순간들의 집적을 통해 이루어진다.
김소연- 내 시를 통해서 나를 느껴본 사람들이 그렇게 외로워서 어떻게 사냐고 묻곤 한다. ‘외롭다’라는 말은 맞지만, ‘어떻게 사느냐’는 그 걱정은 틀렸다. 외로움을 확보하는 순간 오히려 나는 더 힘이 생긴다.
강정- 그 작전이 은근히 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그 유람선을 그냥 잊어버리면 되는 거다. 그렇게 혼자 수영하다 낙오하면 하는 거고 죽을 수 있으면 그냥 죽으면 되는 거지. 그리고 그것 자체가 나의 삶의 내용이자 과정이 되는 거니까 후회할 것도 없다.
- 월간 <현대문학> 2011.7. ‘좌담: 호모 와쿠우스, 호명될 수 없는 삶에 대하여’ 중 -
내 기준에서의 소설가란 무릇 늘 무언가 폭발할 것 같은 압력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뭐 하러 그리 오랜 시간 원고지와 컴퓨터 앞에 앉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영원히 모를 가능성이 더 높은 세계를 창조하고 있겠는가?
위 글에서 강정 작가는 때로 아무런 현실적인 이유도 발견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의 ‘현실적인 이유’란 큰 틀에서의 이유일 것이다. 예를 들면 빚이 몇 억이라든가, 정신적 트라우마를 오래 앓았다든가, 누구나 죽음의 연유로 납득할 만한 특정 사건에 포함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글에서 말하듯 작은 것들이 모여 부풀리기 마련인 삶이라는 순간적인 압력의 팽창을 어느 시기든 넘어서지 못한다면, 혹은 않는다면 겉보기에는 큰 이유 없는 죽음일지라도, ‘현실적이지 못한’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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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도 아니지만, 글 쓰는 일은 내겐 언제나 죽음충동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그 욕망도, 쓰는 일도, 늘 현실과 상통하지 않았다.
내게는 아주 어려서부터, 너무 갑자기 죽지 않기 위해서, 세상을 등지지 않기 위해서, 글을 알고 쓰는 일이 중요했다. 말하자면 글쓰기가 내게는 작은 압력들 앞에서 버텨내는 하나의 방편이었던 듯싶다.
글을 쓸 줄 아는 한, 사랑하는 한, 적어도 나는 스스로 갑자기 죽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이 말인즉슨, 죽지 않기 위해 써야만 했다. 글은 그 자체로 죽음이기에, 글 쓰는 일은 잘 죽는 일, 혹은 이미 잘 죽어있는 시간과 같기에 나는 글을 쓰며 삶을 버텼다. 살았지만 죽어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꽤 오랜 시간 죽음과 함께하며, 죽음에 길들여져 온 셈이다.
이제 와 고백이지만 그건 나쁜 의미에서의 죽음이었다.
그렇게 참 오랜 시간 살았더니, 강정 작가가 말하듯 이젠 그 압력이 팽창하며 여러 번 벌어지다 못해 뜯어져 바람이 실실 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통로를 지님으로 비로소 어떠한 한계를 통과하여 넘나드는 기분이 든다.
요즘 나는 자유를 느낀다. 비로소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다. 나의 미래의 감정과 생각까지 장담할 수 없어 가끔 이 말을 주위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조차 내뱉을지 말지 고민하지만, 나는 스스로 신기한 부분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사실 나는 외롭지 않다. 이것이 신기한 이유는 보통 사람의 기준에 맞추어 볼 때, 나의 일과는 충분히 외로워야만 하는 일과이기 때문이다.
어떤 마인드 트레이닝이나 자기세뇌를 거쳐서가 아니라, 나는 정말로, 정말로, 진실한 의미에서 외롭지 않고, 외로운 적이 없어서 스스로가 신기하다. 요즘 나는 반대로 꽤 명랑하고 너무 즐겁기까지 하다.
예술과 함께 있는 한 외롭지 않아야 할 이유는 충만하다.
게다 요즘은 보고 즐길거리가 지나치게 많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고, 역사는 삭제되지 않는다. 증폭만 남는다. 그러므로 외로울 시간도, 이유도 없다. 삶이 앗아갔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언제나 힘들다. 늘 해야 하고, 늘 골치가 아프다. 그 치열한 고민 앞에서 데인 듯한 아픔은 느낄지언정, 뜨거워서 울지언정 외로운 법은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 감정을 느낄 줄 몰라서 아주 먼 미래에는 내가 외로움을 느낄 줄 모른다는 이 사실을 깨달아 가는 일 때문에 조금 쓸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래서 외롭지 않지만, 외로워도 그 말을 더 아껴 뱉으려 한다. 진실로 외로울 때 표현하기 위하여.
사실 내가 이제야 어느 정도 외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관의 변화와 관련 있다. 과거에는 죽음이 무척 두려웠지만, 이젠 죽음이, 단정적으로 정의할 순 없어도 인간 존재의 연장선상으로 좀 더 보편적으로 느껴진다. 강정 작가의 멋진 말에서 느낀 것인데, ‘그렇게 혼자 수영하다 낙오하면 하는 거고 죽을 수 있으면 그냥 죽으면 되는 거지’.
맞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상황에 맞춰 살고 바뀌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올 테면 와라’보다 ‘무엇이든 오게 될 것은 온다’. 요즘 내 마인드다.
이렇게 될까 저렇게 될까, 물에 빠지지 않을 수도 있는 인생인데, 아무도 빠지라고 강요한 적도, 바란 적도 없는데, 빠졌는데 의외로 체질에 잘 맞을 수도 있는데, 빠지기 전부터 상상하고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안 빠질까, 빠진다면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그 고민들에 압사당하는 게 여태 내 삶이었다. 땅 위에서 숨 쉬고 살았지만, 물속에 붙잡혀 있었다.
발췌한 대담에서 강정 작가는 그럴 때 그 위세에서 벗어나는 매우 쉬운 작전이 있다며, 내가 표류되었고, 한때 무사태평히 타며 앉은자리를 보존했던 유람선이 있다면, 물속에서 그냥 그 유람선이 있었다는 사실이나 기억 따위를 잊어버리면 된다고 말한다.
물에 빠질 생각이 없었든, 한번 빠져 보고는 싶었는데 무서워서 미루다 겨우 뛰었는데 생각보다 체질에 안 맞든, 설령 자신의 의지가 아닌 누군가가 고의나 실수로 밀어서 갑자기 찬물에 빠져 지금 심장박동이 엄청 치솟은 채 명줄의 깔딱고개를 넘어가기 직전이든 상관없다. 눈앞에 유람선이 있어도 없어도 조건은 같다. 유람선이 있더라도 그 위의 사람들이 내가 바다에 있는 걸 모르거나, 구해줄 방법이 없거나, 구해주기 싫을 수도 있다. 깨끗이 포기하는 게 낫다. 그냥 그때부터 쿨하게 다시 시작하면 되지. ‘내 유람선은 어디 갔지?’ 미친 듯이 물장구치며 찾지 말자. 바보처럼, 그러다 더 가라앉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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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뚱맞은 이야기지만, 오늘 우리 엄마도 아주 순도 높고 깨끗하고 완전한, 즐거움 1회와 슬픔 1회를 체험했다. 한 번은 완벽하고 깨끗하게 기뻤고, 한 번은 완벽하고 깨끗하게 슬펐다.
오늘 아침에 내가 앞에 일부 첨부한 대담을 읽으며 한껏 겉멋 든 인상을 쓰고 이 에세이를 구상할 때, 갑자기 거실에서는 “와하하하하하하!”, “으흐흐”, “으흐흐흐흐흐흐!” 하는 예능프로그램을 보는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만으로 나 역시 무척 즐겁지 않을 수가 없어서 도대체 뭐가 그리 즐거운지 방문을 넘어 확인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 듣는 사람까지 괜히 배를 잡고 실실 웃게 되는 호탕한 웃음들이었다.
그런데 저녁, 주방에 있던 엄마가 갑자기 온 세상이 떠나갈 듯 “흐으으으으으”, “어어어엉엉엉”, “어어어어어!” 하며 울기 시작했다. 몇 시간 전 아침, 뭐가 그리 행복한지 듣는 사람이 질투 날 정도로 지붕이 날아가라 웃던 사람이 말이다.
그때, 엄마는 분명 멸치를 볶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문 건너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게 엄마가 웬 노래를 따라 부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만큼 생뚱맞은 울음이었다. 동생과 나는 동시에 놀라 각자 방에서 엄마에게 갔다.
나가 보니 엄마는 서서 온 얼굴이 젖은 채로,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로, 울면서도 멸치볶음을 주걱으로 볶으며, 영문을 몰라 하는 우리 앞에서 멸치를 볶는 데 부족한 재료가 있는지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으며. 걸으면서 끊임없이 요리하고 소리 내 울고 있었다.
난 직감했다. ‘할머니 때문이겠지?’
할머니는 치매인데, 요양병원은 지금 코로나 때문에 면회가 안 돼서 엄마는 한 달 넘게 할머니를 못 보고 있다. 할머니는 치매인데, 할머니는 하루하루 기억을 잃어가는데, 엄마는 매일 할머니가 자신을 기억하는지 확인하고, 하루라도 자신을 더 기억시켜야 하는데, 엄마에게는 그 하루하루가 할머니가 자신을 잊어가는 시간인데, 면회는 허락되지 않는다. 엄마가 갑자기 울음이 터진 이유다.
보호사가 전화통화까지 케어해 주기는 힘들어 할머니는 지금 전화조차 받을 수 없고, 인지능력이 없으므로 딸이 보고 싶다며 전화‘할’ 수는 당연히 없고, 할머니가 원래 엄마의 이름과 얼굴은 쉽게 기억하다, 지난번 한 차례의 통화에서 처음으로 엄마 이름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전해만 들었다. 속된 말이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이 때로 너무 우습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다.
‘기억을 잃어가는 병.’
흐르는 시간 앞에서 엄마는 아이처럼 울었다.
모든 병 앞에서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여태 살았던 날들에 대한 회한, 앞으로 남은 날들에 대한 치밀한 계산. 모든 것이 시간과 연관되어 버린다.
엄마도 할 수만 있다면 그 시간을 조금이나마 붙잡고 싶었던 것 아닐까? 멸치를 볶으면서도. 적어도 이렇게 아무런 손도 못 쓰는 채로 할머니의 기억이 떠나게 하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막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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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담으로 돌아와, 영원히 지속되는 충만함은 없다.
방금 전까지 내가 분명 초호화 크루즈를 타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었는데 눈을 감았다 뜨니 갑자기 망망대해 찬물 속에 구명조끼나 튜브조차 없이 떠있다고 해도 놀라지 말자. 그냥 그때부터 어떻게 살지 생각하자. 인생이란 그런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