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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writer Jul 08. 2021

AI 시대의 도래와 범용한 인간의 도덕률

<생활감성에세이,애도에세이, 살아남은 한 인간으로서의 연대기>



일부 미래사회 보고서는 2090년가량이면 인류는 크게 4단계의 계급으로 나뉠 것이라 전망한다.

그 내용에 따르면, 최상위 계층은 0.001%의 기업인으로 이들은 지금의 플랫폼 회사가 가진 최첨단 기술을 소유하거나 그 기술의 소유자를 부린다. 다음 계층은 예상 가능하듯 소셜미디어나 방송을 통해 큰 영향력을 가지는 인플루언서로 0.002%다. 그다음 계층은 놀랍게도 AI다. 다만, 이들은 ‘인간’이 아니므로 고맙게도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머지 99.997%의 ‘모든’ 인류는 단순 노동자 혹은 마땅한 직업이 없는 계급으로 전락한다.


언젠가 인류가 도래할 길에 위의 예상과 똑 닮은 사막화된 전경이 펼쳐지지 않으리라고 낙관하긴 어렵다. 자본이 기본적으로 피지배층을 착취하는 일에서부터 부를 증식한다는 것은 떨쳐낼 수 없는 진실이다. 정해진 통화량 내에서 자본주의는 시소게임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지나치게’ 더 많이, 폭발적으로 번다면 같은 시각, 다른 누군가는 ‘생계의 갈림길’에 서야 한다. 돈은 내부에서 순환하지, 외부에서 끊임없이 들여오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 세상의 수많은 자산가 중 진실로 존경할 만한 의미의 자산가라 불릴 사람이 몇이나 될지 먼저 묻고 싶다. 


지금이야 속된 말로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도 의지만 있으면 푼돈이나마 벌 일자리가 남아있다 쳐도, 기술로 손쉽게 대체 가능해 굳이 인간 채용이 필요 없는 ‘가짜 일자리’들을 본보기 식으로나마 남겨 둘 필요가 없게 될, 이를테면 미래 “지식기술의 폭증 시점”에 그때나마 자산가들에게 같은 존재자로서 다른 인간을 배려하는 절제력이 머리를 들추고 그 고아한 인격을 발휘할지 의문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간 마트엔 그간 4~5명 정도 상주하던 점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내인 1명만 동분서주하며 50~60대 이상의 어르신에게 셀프 계산기(키오스크) 이용법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 안내조차 젊은 이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간 수많은 가게에서 셀프 계산기를 이용했지만, 어쩐지 이 마트의 변화만큼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처음 방문했던 시점부터 셀프 계산기를 이용했던 곳이 아니라 그 변화점을 같이 맞이했기 때문이다. 자주 가는 마트는 아니었기에 일하시던 분의 얼굴을 기억한다거나 이름을 아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좁은 곳을 질서 있게 메우고 교대하던 계산원이 기기로 대체되었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마음이 쓸쓸했다. 이러한 환경이나 변화의 변곡점에서 아직은 비교적 자유로운 듯한 20~30대는 지금의 이 소소한 듯 보이는 변화를 어떻게 실감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작 앞으로 전격으로 도래할 이 거대한 변화의 징후를 온몸으로 맞이해야 할 세대는 바로 우리 20~30대일 것이다. 어쩌면 세계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인구 쇼크’의 문제까지 겹쳐, AI가 단순 인간 노무를 대체하는 것을 격렬히 반대할 인력조차 줄어들지 모르지만 말이다.



                                                                                       :::



최근 읽은 책 <인간혁명의 시대>에서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해 AI에 대항할 ‘인간만의 체력’을 기르자고 주장한다. 일단, 전제는 우리가 정보나 지식의 양으로는 AI를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자는 데서 출발한다.


예로, 의사 로봇 ‘왓슨’은 8초 안에 진단과 처방을 완벽하게 내리고, 변호사 로봇인 ‘로스’는 초당 1억 장의 문서를 검토한다. 하지만 이 기계들은 결코 아픈 인간을 위로하거나, 법의 심판대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의 정신적인 지지대가 될 수 없다. (아니, 우리가 그 감정의 자리를 그들에게 의지함으로써 내어주어서는 절대 안 된다.) AI를 인간의 형상에 가깝게 만들려는 것도, 마치 그들에게 인간이 가진 정서적 온기나 쓰임이 있는 양 느끼게 하기 위한 하나의 기술에 불과하다는 말이 왜 나오겠는가?

즉, 인간이 이제 세상에 대항하고 서로를 지킬 힘은 인간만의 ‘감정’, ‘윤리’, ‘인성’에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이 세 가지가 보장하는 ‘공감 능력’에 있다.


즉, 여기서 중요한 건 “발전을 저해할 수 없다”면 발전으로 도래할 세상을 어떻게 완충지대로 만들지를 선제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여기에 두 가지 방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경제적 완충지’를 만드는 것이다. 둘째‘속도적 완충지’를 만드는 것이다. 첫째와 둘째 모두 ‘발전의 욕망을 저해할 수는 없으리라’는 전제 위에서 그리는 도안이며, 그렇게 접근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리라고 생각한다.


먼저 첫째, 경제적 완충지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해 보자면 나는 이것이 ‘기본소득’의 길이라고 믿는다. 기본소득의 필요성이 정당하다고 믿는 관점은 크게 아래 세 가지 이유에 근거한다.




◆ 기본소득의 정당성 3가지:

① 로봇세 환수의 개념
- 앞서 예시했듯 마트의 점원들은 기계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다. 기계가 인간을 대신해 일하는 것이므로, 이를 ‘로봇세’라는 세금으로 환수해 기본소득으로 제공해야 한다. (결국 이는 기업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즉, 인간을 끝내 ‘배려’하지 않는다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미래사회의 어젠다를 제시하는 일과 관련해서는 결국 ‘시민’이 똑똑해야 한다. ‘공평함’이 무엇인지 공부하고 인식하고 자신의 인식에 따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② 정보취합 및 이용료 환수의 개념
- 수많은 기업은 각 개인이 인터넷 활동을 통해 남김으로써 제공하는 갖은 데이터 소스를 이용해 그들의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한때 ‘유료 광고’임을 명시하지 않은 유튜브 PPL, 과장광고로 문제가 된 인플루언서들의 사례로 생각해 보자.

기업들은 유명인을 활용한 협찬 광고에 적게는 몇 천에서 많게는 억대의 금액을 지출한다. 그런데, 어떤 ‘나’라는 사람이 한 유명인의 인기채널을 한 번 우연히 보았는데, 이후 지속적으로 그 유명인의 채널이 필터를 통해 계속 ‘나’라는 사용자에게 노출돼 그 유명인의 채널을 또 보고, 계속 보다 보니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게 되니 그가 광고한 제품을 사게 된다면, 결정적으로 그 공의 일부는 ‘그 유명인의 채널과 나라는 사용자 사이에 접점이 있다’는 신호를 온라인 세계에 남긴 ‘사용자 자신=나’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비뚤어진 부의 구조는 개개인의 데이터 소스는 무절제하게 절취해 한 번 구경한 온라인 사이트의 접시나 핸드폰 케이스의 광고들이 이후 내가 인터넷을 하는 며칠 내내 웹페이지 한편에 계속 노출되며 끈질기게 따라붙게 만들어 존재를 상기시키고, 구매를 유도하고, 결국 구매시키는 데 성공하면서도 내게는 그 어떤 인센티브도 주지 않는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마땅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정보를 남긴 것은 우리 자신이다. 그럼 우리에게도 마땅히 소득이 발생해야 한다. 하지만 부는 이 부의 숨은 체계도를 설계하거나 이해해 자신의 편의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다른 이들이 열심히 채집한다. 구매를 일으키는 로직에 사용자의 개별 정보가 반영되어 있는 셈인데, 그 취향의 제공자인 우리는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정보를 갈취당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인터넷을 사용할 때 인터넷 페이지 어딘가에 숨겨진 데이터 채집 기술(눈에 보이지 않는 픽셀)은 우리의 사용정보를 순식간에 모으고 이는 경매에 올라 사고 팔리며, 순식간에 우리 눈앞에 가장 적합한 종류의 번뜩이는 광고로 노출된다. 이를 ‘임프레션(인상)’ 광고라고 한다. 흔히 배너 광고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게다, 미국 최대규모 온라인 쇼핑몰인 <아마존>은 사용자의 소비성향에 따라 호가(가격)를 조정하는 치졸한 방법까지 사용해 마켓의 최강자가 됐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쉽게 말해 ‘구매자 A’와 ‘구매자 B’의 소비성향, 검색 기록 등을 수집해 같은 제품을 A에겐 10,000원에 B에겐 12,000원에 파는 것이다. B에겐 12,000원이라면 싸다고 살 물건이, A의 경우 절대 구매하지 않을 가격대라면 A에게는 그에 맞는 맞춤가격을 제시하는 것이다. 개인의 성향을 파악해 각자에게 적합한 가격(물건을 파는 데 성공할 만한 가격)을 제시하는 것인데, 사용자의 데이터나 인터넷에 남긴 흔적들을 취합하지 않는다면 이 같은 일은 ‘절대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즉, 4차 산업혁명 시대(바로 지금)의 다수의 기업 활동은 구매의 적중률을 높이는 데 소비자의 패턴분석을 이용함으로써 상당한 실리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그에 속한 정보 채집, 정보 이용 비용은 지불하지 않고 착취만 하는 것이다. 조정될 필요가 있다.


③ 많아지는 공급에 비해 적어질 수요의 완충막 개념

- 기술처리 속도와 공정의 자동화가 신속히 진행되면서 한 사람이 동일한 제품을 생산하고 공급하기 위해 들이는 비용과 시간은 상당히 축소됐다. 이로 인해 같은 제품을 생산하거나, 같은 종류지만 다른 디테일로 생산하는 생산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반면, AI 시대의 도래로 일자리를 잃어 가고, 그럴 것이라 전망되는 젊은 층의 소비 패턴은 축소되고, 갈수록 돈을 쓰지 않는다. 여기에 인구구조에서 청년들의 비율은 점차 낮아지고, 이런 환경에선 애를 낳을 수 없고, 낳기도 싫다는 판단하에 낮아지고 더 낮아질 미래의 출산율까지 고려한다면 기성세대의 더욱 쉬워진 공급이 기하급수적으로 넘쳐날 거라는 이 ‘실질적’ 구조는 실로 비극적이다. 그러니까 “누가, 이 넘쳐나는 공급을 감당할 것인가?”




이 세 가지는 기본소득으로 ‘경제적 완충지’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며, 만들 수 있는 이유다. 이는 꽤 타당한 제안이기도 하다.


두 번째, 속도적 완충지는 ‘인간의 긍휼(자율)’에 기대는 방법이다.

인성, 품성과 관련한 다양하고 통섭적인 전인교육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가진 힘을 이해해 사회가 나아갈 방향과 세기를 절제하고, 설사 절제가 어렵더라도 모든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는 방향의 차선책을 세우는 데 늘 기꺼이 협력함으로써 변화에 도태될 사람들을 미리 구제하기 위해 사고하는 힘을 개개인이 기르고, 그 의식의 힘이 사회의 바탕이 되고, 자율적이면서도 간접적인 의미의 속도적 완충안으로 적용되도록 하는 방법이다.

경제적 완충지를 만드는 일이 국가적 범위의 사회기획에 가깝다면(하지만 여기에도 인간이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의거한 동의가 필요하다), 두 번째 속도적 완충지를 만드는 일에는 개인적이어서 아주 소급적이고 광범위한 범시민적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모두를 기획해 나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 방향을 기획하는 우리의 ‘인식’이다. 즉, 현실인식 능력이다. 우리는 지금 현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상황을 이해하고, 그 위에서 현재와 미래의 나(인간)의 위치와 역할, 나의 사회적 쓰임과 타인과의 상호관계에서의 이타성의 범주를 미리 결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안정적이고 선제적으로 미래에 도래할 변화에 가장 적게 휩쓸리고, 가장 적게 다치면서 함께 안전히 착륙할 수 있다.


사실 인간에겐 사랑, 분노, 증오, 용기, 시기, 미움, 질투 등의 다양한 감정이 존재한다. 이 감정이 불필요한 문제들을 야기할 때가 많기도 하지만, 도리어 그래서 인간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복합적인 감정의 영역에서 이상적인 감정적 도덕률의 사례를 AI에게 주입하면, 인간에게는 난센스라 불릴 만한 특정 상황에서 AI가 인간보다 더 합리적이면서도 도덕적으로 월등히 현명한 결정을 무척 빠르게 잘 해낼지도 모른다. 그런데 통한의 고통이나 분노 앞에서 가슴을 치며 울고, 기쁨이나 환희를 느끼고, 때론 어떤 인간이 되겠다고, 혹은 되지 않겠다고, 좋거나 나쁜 마음을 먹고, 그로 인해 나아가고 성장하고,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는 이 ‘몹쓸’ 인간이란 영역은 도저히 AI가 대체하거나 침범할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이다. 우리가 매일 더욱 인간답고자 노력하며 끊임없이 싸워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월등한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염치없는 영역은 오직 인간만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유일한 영역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더 품격 있고 설득력 있게 인간을 위하고, 서로를 경청하고, 그 토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펼쳐 가는 덕을 갖춘 인간이 될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앞으로의 학교 교육을 바꾸는 방향이 될 것이고, 돼야 하며, 더 가속화될 인구 쇼크의 문제들, 그로 인해 (경고되었으나 무시해) 유발될 새로운 문제들, 그동안 곪을 대로 곪아온 각종 불평등의 문제 앞에서, 오히려 사회에 새로운 변곡점을 제시할 빌런으로 분할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의 자리는 좁디 좁아지고, 이 세상에서 AI가 인간이 쓰임받을 비중을 뚫고 한 주체로 자리 잡더라도, 그와 동시에 이루어질 전보다 더 인간답기 위한 노력들이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인간이란 개체를 더욱 공고하고 따스하게 지켜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전에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더없이 인간다운 삶과 사회가 도래할지도. 이상향일 뿐이지만….


결국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끝없이 집중한다면 그 끝에는 ‘돈이나 자본이 아닌 만나본 적 없는 존엄과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끝내 염원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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