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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writer Jul 20. 2021

출판하는 마음

<생활감성에세이,애도에세이,살아남은 한 인간으로서의 연대기>



출판사에 들어가기 전, 서울의 한 컴퓨터학원에서 막 디자인편집 프로그램 강좌를 수료한 나는,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마음에 실무 경험이 없는 만큼 저렴한 가격에 디자인을 해드리겠다는 제안으로 사진집 제작을 의뢰받았다. 결론적으로, 그 경험으로 회사에 들어갔다. 실무 상식이나 프로세스에 대한 경험이 없다 보니 이상하다는 판단이 드는 지점에서 강한 의견을 내기 어려웠다. 무엇을 잘하고 있으며, 무엇이 부족한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표지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의뢰인은 앞표지 디자인은 자신이 고민해 볼 테니, 뒤표지 시안을 작업해 달라고 했다. 한 명이 먼저 시안을 만들면 이를 공유한 뒤 남은 한 명이 비슷하게 맞추는 작업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콘셉트 회의를 해 의견을 나눈 뒤 각자 만들자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한 명은 앞쪽을, 다른 한 명은 뒤쪽을 고민해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앞표지, 뒤표지란 하나의 펼침면을 접은 연결도인데, 콘셉트를 맞추는 과정 없이 뒤표지를 고민해 보라니 아이디얼하게 바라보려 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실무 경험이 전무해,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나 나의 최선을 평가하는 표현들이 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순전한 나의 이해력이나 경험 부족 탓은 아닌지 초조해했다.


표지 디자인도 내 부족이겠지만 원하는 그대로 만들어 드려야 해서 좋은 디자인을 하는 건지 마음이 불편한 데다, 10여 차례의 교정본을 전달받는 동안 같은 표현 하나가 띄어졌다, 붙여졌다가 반복됐다. 디자인보다는 글공부를 오래 해서 내가 아는 틀린 부분은 내색 없이 고쳐 드리기도 하고, 여러 번 고치셨다는 표현은 나도 다른 출판사에서 잠시 근무할 때 정확한 표기적 답안을 정하기까지 당시 기준으로서는 많이 헷갈렸던 표현이라 전체적인 수정사항 속에서 바뀌는 걸 보다 의견을 드렸더니, 디자인 아이디어를 기대하는데 부탁하지 않은 역할까지 한다며 편집자들이 참고하는 교정프로그램을 참고해서 말하라며 받아치셨다.


그럼 의뢰인은 그 프로그램을 참고하면서 내가 몰래 고칠 정도로 틀린 표현들은 왜 잡아내지 못했으며, 심지어 내가 아는 척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왜 한 표현을 세 차례나 반복해 수정한 걸까? 자신도 정답을 몰라 번복한 것일 테고, 과도한 수정사항에 대한 피로감에 나도 한마디 말이 나간 것일 텐데 프로그램을 앞세우셨다. 아마, 디자인 실무경험이 전혀 없는 듯한 나에게 어느 순간부터 강한 불만을 느끼셨던 것 같다. 나로서는 의견을 많이 드렸으나 번번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고 하셨고, 모든 과정에서 지금 생각해도 열과 성을 다했으나 기대에 못 미치면 의견이 없거나 프로가 아닌 것처럼 퇴색되었다. 내 디자인이 별로이고, 실무적 프로세스에 있어 되레 의뢰인에게 의존도가 높았다 해도, 결국 의견대로 수정할 수밖에 없어 실력에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늘 감사를 표했던 내 입장에서 불쑥불쑥 마음과 진심을 호도당하는 순간들이 잦아 당황스러웠다. 디자인에 있어 실력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디자인 일을 너무 하고 싶어 경험이 없음을 공유하고 거의 사례비 없이 시작한 작업이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순간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기대치나 동일시되지 않는 방향성이나 취향을 두고 일방적으로 윤리의식이 없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계속된 수정사항을 마치 당연한 듯 반영해야 했던 것이 당시 나의 역할이었기에, 같은 표기가 번복되는 것에 의사표현 정도는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첫 작업’이라고 말했지만, 정말 순수한 의미의 처음인 줄 나중에 이해하신 듯했다. 훗날 돌아보니 내 용기가 과했고, 경력이 전무한 만큼 어설프고 단견이 잦은 부족한 작업일 수밖에 없었다. 이 지점은 분명 내가 만족을 드리지 못했으나 경력 있는 디자이너라면 애초에 격려 조에 가까운 사례비에 같은 일을 해드리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전적으로 부족했지만 매 순간 모든 최선을 다했고, 의뢰인도 직접 책을 만들고 편집을 해보는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일은 의뢰인의 헌신과 이를 뒷받침하려는 나의 노력으로 여차저차 마무리됐다.


그런데 내가 실무경험을 쌓기 위해 회사에 입사한 후 2쇄를 진행하자며 연락이 왔는데, 나의 회사 입사를 예상하면서도 현재 작업이 가능한 스케줄인지 묻지도 않은 채, 금주 중으로 수정작업을 진행하면 될 것 같다며 반영했으면 좋겠는 수정 의견을 공유해 주면 고맙겠다는 것이었다.

거의 작업비를 받지 않고 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마치 당연한 것처럼 부차작업 스케줄을 전달하시며, 중요한 건 ‘금주까지 하면 된다’라고 스스로 시간을 정한 뒤 나에게 말한다는 점이 납득하기 힘들었다. 첫 작업을 함께할 시 쏟아지던 수정사항을 생각하면 간단한 작업이 될지 아닐지는 나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적어도 ‘현재 작업이 가능한지’, ‘언제까지 완료되면 좋겠는데 그 또한 가능한지’ 묻는 게 먼저였다. 순서가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증쇄까지 염두에 두었어야 하는데 전체 프로세스를 고려하지 못해 죄송하지만 후사까지 함께 처리하기는 힘들겠다고 말하며 책임 없는 사람이 되는 길을 택했다. 작업자로서의 윤리를 고민하는 일을 넘어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그만한 대가를 요구해야 서로 불편하지 않다는 것을 처절히 느낀 경험이기도 했다. 누구나 시작은 미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죄송하기는 하지만 정말 내 책만큼 최선을 다했고, 편집디자인 경력이 약간 쌓인 지금에 와서 봐도 ‘첫 작업’인 것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크게 성토당할 만큼 부족한 디자인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는 실제로 회사에 막 입사한 시점이라, 부차적으로 다른 일을 진행하기 벅찬 시기이기도 했다. 디자인 규율에 대한 이해와 범속적인 처리 속도가 부족했던 나는 회사에서 매일 호통세례를 맞고 있었다. 그래도 연락에 최소한의 배려가 있었다고 느꼈다면 많이 고민했을 것이다. 못 하게 되었을 때, 나를 많이 자책했거나 어떻게든 할 방도를 궁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같은 회사에 소속된 직원도 아닌데, 오랜만에 연락하며 형식적인 질문도 갖추지 않고 답을 통지하는 모습에 관계를 지속하면 같은 이유로 계속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작업하는 동안 일방적인 불호령을 들은 일도 있다. 밤새워 가제본용 파일을 만들고 있는데, 끝까지 완벽을 기하는 것은 좋으나 중간에 수정사항이 또 전달되었고, 인쇄소도 기다리고 있으니 확인 차 건 전화에서 늦어지는 상황에 벌컥 화를 내고는 나중에 과했던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밤까지 새워가며 마우스에서 손 한 번 떼지 않고 이를 물고 작업하고 있는데, “최선을 다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같은 말을 해 작업자로서의 나의 진심이 어디까지 닿아있는지, 닿을 수나 있는 건지 화나고 황망했다.


하지만 책과 삶에 대한 열정은 배울 구석이 많았고, 출판과 관련한 실무 전반에서는 훨씬 프로이고 선배였다. 무엇보다 모두가 나름의 태도로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조금씩 마음에 틈이 생겼다. 진심은 다했지만, 기술적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많은 아이디어를 주셔 배우기도 했다. 그래서 출판 일은 늘 공부가 필요하고, 더 열심히 임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그분이 좋아한다던 책의 제목이 “출판하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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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출판원고를 두고 큰 방향의 조언과 개선 지점을 상담해 드리거나, 진행 방법을 요원해하는 모습에 상담자는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나서, 나도 정리해 둔 바가 없는 정보를 추려 드리면서, 이것 때문에 미안해 나하고 일하지 않아도 되니 최상의 작업자를 찾으라고 말씀드리지만, 이후 어떻게 일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는지 아무 연락을 못 받는 경우가 많다. 나의 돈벌이보다 책이 책에 걸맞은 작업자를 만나 작업됐으면 하는 바람에 다른 디자이너까지 소개하는 등 도움을 드리고는 책의 출간방향을 비롯한 이후 소식이 궁금하니 부담 없이 전해 달라는 말씀만 드리는데, 대부분 연락을 못 받는 것이다.


물론 한편으론 바뀌어 가는 계절 속에서도 여전히 잘 지낸다는 소식을 알고, 함께 작업하지 않아도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서로의 삶이 흐르고 있다는 것과 서로 살아감으로써 ‘무사태평’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하나의 안도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도 생겨서 신기하다. 회사에서 많은 원고를 처리하느라 편린적이고 추상적으로 사람을 대했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을, 더 짧은 시간 안에도, 글로써 더 깊게 느낀다.


여러 작업자와 상담하다 보면 부차적인 절차는 잊히기 마련이겠지만, 나에게도 없던 정보까지 마음을 담아 정리해 드렸는데 그 전달 자체에도 아무런 답을 못 받는 경우가 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어쩔 수 없이 사람이 책을 ‘출판하려는 마음’이 뭔지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 재밌게도 이런 단절이 먼 훗날 누군가를 살리는 기사회생의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다급한 순간에 기억 속에서 나를 떠올리시고 부랴부랴 함께한 작업이 서로를 돕는 방향으로 완성되는 경우다.)


책 시장의 본질을 가까이 접하고 알면 알수록 모든 일들이 대외적인 취지에 부합해 진행되지는 않으며, 취지만큼 아름다울 수도, 아니, 언뜻 취지가 아름다운 만큼 그에 수반되는 부식된 취지들도 찌꺼기처럼 달라붙는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하지만 여느 감정들이 그렇듯 이 역시 치열하게 바라보되 때에 따라서는 적절히 관조할 줄 알아야 한다. 부족한 만큼 채우며 나아가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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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아 현재 감정의 실타래를 붙잡고 그 시작점을 한없이 찾아 들어가다 보면, 우리가 꽤 많은 것을 기억의 저장고에 남겨두고 있으나, 새로운 매일을 기억하느라 잠시 그 자리를 가짜로 밀어내어 주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모든 것은 아닌 듯해도, 영원히 기억 속에 남는다.

여기서 ‘모든 것’은 진짜 중요한 것, 그럼으로써 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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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 시절, 내가 가는 소아내과 병원의 여의사 선생님이 온화하고, 내가 말하는 모든 증상들을 한없이 귀 기울여 듣고 눈빛으로 보듬어 준다는 점 때문에, 그분이 진단한 ‘폐렴’ 증상이 낫지 않음에도 계속 그 병원에 다닌 적이 있다. 그분의 피부는 천사처럼 고왔고, 두 눈은 정직하게 반듯했고, 머리에는 담백한 윤기가 흘렀으며, 늘 보기 좋은 풍성한 굴곡으로 굵게 세팅되어 있었다. 하지만 각혈에 가까운 모양새로 기침이 심화되면서도 낫지 않아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다른 이비인후과에 가니, 난 폐렴이 아닌 ‘후두염’이라고 했다. 거기서 간단한 한 번의 처치와 처방약을 먹고 바로 나았다. 하지만 그 직후에도, 지금도, 난 그 소아내과 선생님의 실력을 의심하거나 원망한 적이 없다. 도리어 그 선생님의 마리아처럼 따뜻한 모습은 아직까지 내가 생각하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선한 인품과 인상의 자화상으로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사실 누군가를 의미 없이 미워하다 보면, 인정하기 싫지만 그 일(내 미움의 근거들)에 오해도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수만 가지 이유로 사랑하다가 그 사랑이 지나친 외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영원할 것이라고 맹세한 그 마음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누구보다 차갑게 떠나기도 한다. 그보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정말이지 뚜렷한 별개의 감정 같다. 편애와 편견도 나쁘다는 점에서 층위는 조금 다르지만, 애정과 그 애정을 다루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 완벽한 별개라는 점에서 결국 마찬가지다.

편견은 나쁘지만, 편애는 나쁘지 않다. 둘 다 보편적이라는 관점에서만 그렇다. 편애가 인간 삶의 편의를 가장 쉽게 보호하는 보편적 수단이기에 이조차 반이상적으로 볼 수는 없다. 모든 요소를 동일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애를 어떤 방식으로 휘두르느냐의 문제인 ‘편견’은 편애와는 전적으로 다른 행위다. 대부분 상대보다 우월한 ‘지위’를 근거 없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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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예전에, 하루 시 한 편씩을 필사하는 행위가 주는 마음의 넉넉함을 친구에게 강변한 적이 있다. 나만 아는 아주 오래되고 개인적인 연유에서, 내가 아주 사랑하는 친구였다. 그 친구가 말했다.


“우와! 나한테도 (시) 추천해 줘.”

“알겠어. 내일부터 보내줄게.”


뒤이어 그 친구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듯이 물었다.


“설마, 매일 보내는 거 아니야?”


‘매일같이’ 시를 읽는 일의 즐거움과 삶의 혜택을 강변했기 때문에 ‘당연히’ 나는 매일 보낼 생각이었다. 매일 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행위였다. 나는 저 대꾸에 놀랐고 상심했다. 그때, 정말이지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일 사이에는 큰 공백이 있다는 것을 마주했다. 단순한 호응, 한 차례의 호기심과 진짜 원한다는 것의 차이도 깨달았다. 그보다 더 크게 배운 것은 그 당연한 낙차를 이해하고 다스리는 방법을 배워야 앞으로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너는 혹은 그나 그녀, 그들은, 무언가를 그저 좋아할 뿐 (나처럼)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그 판단마저도, 나와 동등한 기준을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내가 부여하는 하나의 ‘편견’이나 나의 ‘지위’일 수도. 혹은 나 혼자 무언가나 누군가를 너무 지나치게 사랑해서 일어나는 ‘편애의 반향’ 같은 걸지도.

사실, 모든 진실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A가 B인 것이기도, 또, B가 A인 것이기도 하고, 멀리 돌고 돌아, 이제야 진실을 알았다고 말은 하는데 A가 실은 정반대의 극단이었던 Z였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C와 A는 극단적으로 다른데 동시에 C는 살짝은 A이면서 B이기도 하고, 어느 순간 이 모든 게 전부 ‘0’에 가까운 성질로 수렴되기도 한다.

이때는 물리적으로 죽을 때거나, 혹은 죽을 때가 오지 않았는데 미리 죽음을 생각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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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내가 리라이팅 작업을 해드린 책 1권이 출판사 투고에서, (일단 1곳에서지만) 바로 계약하자는 긍정적인 답을 받았다. 제안을 받아 처음 시도해 본 윤문·첨삭 작업이었는데 성공한 기업가인 그분이 작업자인 나를 대하는 태도나 원고에 담긴 메시지가 일치해 많은 귀감이 됐다.


결국 질타 앞에서도, 칭찬 앞에서도, 늘 더 많은 경험과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삶의 어떤 문제나 영역에든 갖은 이해와 오해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단 한 차례 경험한 진실 앞에서 모든 감정과 판단들을 봉인한 채 ‘옳고 글렀음’을 포박하고 평생의 답변으로 괄시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 책을 투과하는, 여태까지와 앞으로의 내 모든 이야기들과 사건들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바탕이다.


때로 누군가 잘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람을 나서 더 옹호하고 보듬어 주고, 틀린 주장이라도 함께 목소리를 높여 주고 싶은 경우를 만나는 것처럼, 인간의 삶과 사회가 슬픈 것은 우리에게 없는 능력을 설명으로 메우려 할 때 나타나는 특유의 슬픔의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 그 공백 속에서 지레 겁을 집어먹고 웅숭그린 사람의 뒷모습을 볼 때면, 조용히 다가가 하염없이 편을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언젠가 내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지나치게 겁을 먹었을 때, 누군가 나를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구제해 주길 바라서는 아닐까.


어렸을 때 날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내가 먼저 그 친구를 싫어한다고 믿어 그에 대한 반사각으로 나를 미워했다는 점과, 한때 내게 열렬해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 모든 촉각을 다 기울였던 상대가 지금은 오히려 기억 속에서 더 안온한 것 등, 마음은 변화하고, 변화하지 않기도 하고, 변화하지 않으나 변화한 듯 보이기도 하고, 변화했으나 변화하지 않은 듯 숨기기도 한다. 즉, 오늘의 감상은 단지 오늘의 감상일 뿐, 혼자만의 입장과 생각을 이렇듯 혼자만의 공간에 불쑥 털어놓는다는 것은 자주 (그보다 대부분)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 삼키고, 가상의 인물로서 그리고자 소설가를 꿈꿨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때로 무척이나 공평하지 않고,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누군가에게는, 특정한 어떤 상황에서는 자주이거나 늘, 불합리한 상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상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에 반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흐른다.

잊힌다. 너무도, 공평하게.


그 안에서, 우리들은 서로에게 꾸준하게 불합리하다.

누구나 다 모조리, 털끝 하나까지 ‘잊히는’ 것이 결국엔 모든 인생의 목적. 지루하게 반복하지만, 그래서 어쩌면 지금을 살게 하는 바로 이 순간의 ‘기억’과 ‘감정’이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걸지도. 일단은, 내게 오는 하나하나의 모든 인연에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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