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감성에세이,애도에세이,살아남은 한 인간으로서의 연대기>
나는 평소 어깨 통증과, 안구 건조로 인한 눈과 머리 통증이 심한 편이다. 먹을 만큼 먹은 나이임에도,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내 몸의 통증을 줄이기 위한 처방을 내리는 일에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지닌 습관으로 나는 약 먹는 일을 특히 삼갔다. 나는 자연스러운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두통이 왔다면 언제든 가리라고 생각했다. 우습게도 그 생각은 나의 자부심이었다.
당시 내 친구 중 머리가 조금만 아플성 싶으면 바로 두통약을 집어삼키는 친구가 있었는데, 나는 거의 매일 그 친구가 두통약을 먹는 걸 목격했다. 나는 그 친구 대신 ‘내성’이란 단어를 두려워했다. 아플 때마다 습관적으로 약을 먹다 보면 정말 나아야 할 때 약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라며 멀리서 지나치게 우려했다.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살고 싶어서, 참다 보면 더 강하게 맞설 힘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관성은 지금까지 이어져 정말 죽을 정도로 아프지 않다면 병원을 잘 찾지 않는다. 감기가 걸려도 약을 먹지 않아 증상을 심화시키거나 시름시름 앓으며 오래도록 낫지 못한다. 주변 사람으로부터 된소리를 얻어맞고서야 ‘내가 그렇게 심했나?’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병원을 찾는다. 대장장이의 배짱처럼 여전히 그 일이 약간은 호들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약간이라도 몸이 으슬으슬해진다 싶으면 당장 감기의 전조 기운을 알아채고, 그 기운이 자신의 몸을 본격적으로 침범하기 전에 활명수와 알약을 입에 황급히 쑤셔 넣는 지금의 또 다른 내 친구와는 여전히 다른 삶을 살아간다. (전장에 나가는 용병의 태세와 비슷한 이 무기론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친구의 발상과 위기대처 능력이 실로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현재 거의 만성으로 가지고 사는 어깨 통증과 눈 통증이 며칠씩 심화되어 갈 때도, 어깨에 파스를 붙이거나 눈에 인공눈물을 넣는 조치조차 모든 평형계가 어긋난 너무 뒤늦게 시행하곤 한다. 아파서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은 데도 ‘습관처럼’ 그 무엇도 찾지 않는다. 글을 쓰는 지금 역시 심화되는 통증들에 병원에 가야겠다고만 생각한 지 벌써 몇 주나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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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아오며 적지 않은 사람을 통해 내가 철옹성처럼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을 목도했다. 그와 반대로 크게 저열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조차 느끼지 못하는 장점들로 나를 좋아했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나 역시 미워하는 나의 단점들로 나를 싫어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미워하는 사람들에 더욱 민감한 것은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지 자신도 이미 잘 아는데 그것이 타인으로 하여금 들춰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거기에 더해 나는 표현을 잘 못하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가 꽤 좋은 사람인 양 보이는 일을 늘 지나칠 정도로 저어하는 성향 때문에 더 많은 오해를 사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나 역시 내가 장점과 단점 두 가지 면을 모두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는, 나는 같지만, 상황이나 상대에 따라 내 모습은 변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합리적이든 때론 비합리적이든, 나로 인해 일어나고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에 합리성과 이유들을 제시하기에는 너무도 긴 세월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꽤 묵직하고 잘 흔들리지 않는 사람,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을 때조차 나는 두려움에 묵상하는 중인 경우가 더 많았다. 그 어떤 선택도 못하는 것뿐인데, 흔들리지 않고 침묵하는 공고한 사람으로 보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너무 할 말이 많아 아무 말도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이미 갈 길을 아는 사람이라 과묵한 양 오인받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무척 활달해 보이는 사람이 종종 자신을 ‘내성적’이라 표현하는 일이 적지 않은 걸 보면, 언어의 규정이라는 것은 언제나 본질적으로 모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안에 성질은 담을 수 있을지언정, 성질의 ‘표본 질량’은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사람을 ‘내성적’이라고 규정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지표들을 어떤 수준으로 충족해야 할까? 지표를 만든다 한들, 이를 수집할 수 있을까?) 그저 일방적인 시각과 상황에서 바라본 인상에 불과하다.
한때, 친한 친구에게 편지 쓰는 일조차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내가 글로써 나 이상의 사람으로 묘사되고 비치는 것이 정당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글을 사랑해 오면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내 이름을 걸고 쓰는 일을 아주 꾸준히, 그 어느 일보다 ‘성실하게 미뤄온 것’도, 나조차 알 수 없고 해석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좋든 나쁘든 어떤 이미지로 선별적으로 인식되는 일을, 설사 내가 글 속에서 아주 솔직하고자 노력하고, 글이 본질적으로 사람이 자신을 가장 본원적으로 표현하게 만드는 마법의 도구여서 내가 그 평가들을 ‘정답’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응당 마땅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원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또,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시시콜콜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하고 싶지 않았고, 이런 에세이류를 쓰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오랜 시간 내 꿈은 소설가였고, 그 이유는 소설 속에서는 작가란 이름으로 내 생각과 사상과 시선을 인물과 서사, 소재 뒤에 숨길 수 있어서였다. 내가 겪은 사건까지도. 또, 사적인 이야기와 감정을 말하는 일에 궁극적인 힘이 있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노력이나 사회적 기여로 이미 충분할 것이라고(아니, 포화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쓰지 않는 나는 끊임없이 죽어 갔다. 소설가로 데뷔할 수 없다면, 무엇이든 써야 해서 결국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갖은 육체의 통증을 방치하고, 내 이름으로 된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으며 생각한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지…?’라는 판단이나 위로는 사실은 습관적인 ‘관성’이 아니라 ‘근원적 두려움’이었던 셈이다. 결국 ‘관성’이란 선택을 전환하지 못하는 병으로, 몹쓸 ‘두려움’을 말한다.
진짜 내 몸을 아프게 만드는 깊은 내적 물증이 발견될까 봐 병원에 갈 수 없는 두려움, 내가 글을 잘 쓰는 인간이 아닐까 봐, 잘 쓰더라도 그게 너무 하찮은 일로 결론 날까 봐, 내가 잘못 표현될까 봐 저어하는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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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사람들은 괜찮지 않은 것을 ‘괜찮다’고 너무 버릇처럼 위안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이나 방향이 전부 잘못 디자인되었다는 생각에 달하고, ‘번아웃’ 상태에 돌입한다.
그러므로, 조금이나마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 사람이 자신을 ‘진짜’ 이기적으로 돌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언어를 심리적으로 교차사용하는 일에서 첫째로 벗어나야 한다. 훗날, 우리의 삶을 결정적으로 후회하도록 만드는 선택들은 대부분 언어를 자신이 안주하고자 하는 편의에 맞춰 심리적으로 변형해 사용하고 편의적으로 인식할 때 나오는 결론에 의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말인즉, “나는 두렵다”라는 말을 상시적으로, 좀처럼 입 밖에 쉽게 꺼낼 수 없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연약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시간 자신을 들여다보고 결국엔 해체하도록 만드는 글 쓰는 일은 언어를 나 자신의 상황에 맞춰 유약하게 사용하고 영리하게 주어진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에 맞서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종종 인간이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방편 중에서는 ‘가장’ 퍽 훌륭한 방편이 되고는 한다. 글 앞에서는 누구나 충분히 부끄러운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다음은 그 체화된 부끄러움을 영원히 안고 살아가야 한다.
이제야 막 읽기 시작한 책 <숨결이 바람 될 때>의 저자, 의사이며 문학도인 폴 칼라니티는 도덕철학과 생리학의 학문적 탐구 및 결합을 통해 삶과 죽음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언제나 그래서 문제인) 인간에게 주어진 극단의 두 조건이자 이분법 안에서의 신비, 접점을 찾아내고자 하는, 살아있는 존재로서는 최상위의 희망을 품었었다.
그러며 동시에 병원으로 쏟아지는 환자들, 1분 1초 차로 생과 사를 다투는 급박한 위기라는 전개도 안에서 점차 효율과 속도, 의학적 판단만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자신의 모습에 씁쓸함을 느끼기도 한다. 신경과학 의사이며, 동시에 문학을 전공한 이로서 그 역시도 체중이 줄어들고, 극심한 단계의 요통을 느끼는 암의 전초단계에 상당 시간 기거하면서도 자신의 증상을 별것 아니라 끝없이 부정하고자 노력했다. ‘괜찮겠지’라는, 결코 관성이 아닌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 숨 쉬듯 으레 하는 ‘괜찮겠지’라는 생각을 인간의 도덕관과 연계해서 말해 보고 싶어졌다. 이에 아래 <숨결이 바람 될 때>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한 어머니는 뇌암 진단을 받고 내게 찾아왔다. (…) 당시 나는 아주 피곤하고 멍한 상태였다. (…) 그녀에게 일일이 답해 줄 시간이 없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 어느 퇴역 군인은 몇 주 동안 공격적인 태도로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의 조언과 위로를 거부했다. 그 결과 (…) 상처가 더 나빠졌다. (…) 나는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업자득이란 없다.
이 부분에서 폴 칼라니티는 자신이 좀 더 진료에 헌신적이지 못했고, 환자를 감정적으로 대했음을 후회하고 있다. 그는 암을 선고받고 죽음을 앞둔 채 이 책을 썼고, 그러한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삶에서 자신이 지녔던 모든 태도들을 주마등처럼 뒤돌아 마주하며 평소라면 아주 사소하게 여겼을 일들에도 자신이 결코 ‘진실하지’ 못했다고 자책할 만하다. 하지만 인용한 부분에서 보이듯이, 내가 보기에는 그 상황에서 꽤나 합리적이었다고 느껴지는 감정조차 그에게는 못내 죄책감으로 남은 부분이 있는 듯하다. 이는 평소에도 문득 도래하는 죄책감이겠으나, ‘사소함’으로 치부해야 그나마 살아갈 수 있고, 죽음을 앞두고는 결코 사소한 일로 모면되지 않는 무엇이어서 그런 듯하다. 나는 생각했다. ‘후회하고 다음으로 나아간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뀌지 않더라도. 그 과정조차 없는 것에 비하면 그만으로 위대하지 않은가?’라고.
실수할 수밖에 없고, 때로 상황에 쫓겨 나 아닌 것들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삶’이라는 환경 아래 자신의 나태함을 먼 훗날에서나마 돌아본다는 것, 그 자체로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는’ 적어도 하나의 긍휼이 잠시나마 구체화되었다고 볼 수는 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한 건, 아마 그가 너무 지나친 기준을 갖고 있었다고 작게나마 그를 위로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하지만 폴 칼라니티의 글은 왠지 그 이상을 가리키는 듯했다….
그러다 나는 오래전, 내가 습작으로 남겨 둔 소설의 한 대목, ‘죄책감의 양지에 자리 잡은 스스로를 용서하는 (습관적인) 관성’을 주목하고 작성했던 몇 개의 문장을 떠올렸다.
우리는 후회하기도 하고 후회하지 않기도 하지만, 심지어 후회하더라도, 반성을 남긴 당시와 똑같은 상황이 도래하더라도, 너무나 빈번히 같은 선택을 한다. 나 역시 자주 그래왔을 것이며, 앞으로도 상당수 그럴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잘 바뀌지 않는다. 후회를 했을지언정, 아주 구체적인 분석과 통한에 의거한 몇몇 후회의 케이스를 제외하고는(이조차 막연하다), 순간적으로 나오는 선택은 엇비슷하다. 그게 삶이다. 삶에는 ‘시간’이라는 조건이 존재하고, 사람에게는 ‘감정’이라는 전초지가 존재한다. 그 감정을 만든 ‘경험’이 존재한다. 우리는 대부분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시간(보편의 조건)과 켜켜이 쌓인 감정(자신만의 근거) 안에서 자신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를 기대받고, 그 과정에서 나 외의 것들에 대한 나태나 무관심은 빈번히 방출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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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 생각에 ‘괜찮겠지’라는 관성은, 삶에서 가장 흔히는 아래의 두 방면에서 쓰이는 듯하다.
첫째는 자신의 상황이나 감정을 돌아보며 괜찮은지 아닌지를 판단할 때다. 이때의 판단은 정말 ‘괜찮은’ 걸 수도, 아닌데 ‘괜찮다고 위안하는 용도’일 수도 있다. 둘은 정반대이기도 하고, 전자가 동시에 후자이기도, 후자로서 전자에 도달하기도 한다.
둘째는 자신이 타인이나 주변 상황에 그리 관용적이지 못했음을 나중에나마 후회하고 ‘죄책감’을 인식할 때, 그 인식에 바로 따라붙는 다시금 스스로를 용서하는 면죄의 용도다.
두 방면 모두 이 ‘괜찮겠지’가 삶을 나아가게 하는 구실로 쓰인다. 타인 앞에 어떤 모습으로든 비췄을 나를 스스로 ‘괜찮겠지’라며 용서하고 위안할 수 없다면, 인간의 삶은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폴 칼라니티 역시 그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후회했다’라는 과거가 아닌, ‘후회했지만 그 뒤로도 후회할 선택을 반복했을 것 같다’라는 예감으로 말이다. 그 사실을 글로 적시함으로써 자신에게 작은 위안을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괜찮겠지?’라고.
하지만 이것이 죽음을 앞둔 자가 공공연하게 하는 마지막 후회라면, 돌이킬 수 없고, 설사 다시 없을 미래에 반복되더라도 하나의 긍휼이 되어야 마땅하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문득 ‘깨닫는’ 부끄러움의 조각들 앞에서조차 너무 쉽게 스스로를 용서하는 데 쓰이는 이 ‘괜찮겠지’의 습관적 관성에 대한 해석, 즉, 어디에도 쓰이거나 활용되거나 읽히지 못하는 내 습작 속 구절을 굳이 인용함으로써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나는 죄책감의 양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건 바로 내가 죄책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는 점에서 오는 즉각적인 면죄, 바로 그 점에 있는지 모른다. 무얼 하더라도 발견되는 권태 탓을 하면 좀 나을지 모른다.
- 이름 모를 영원히 쓰이지 못하는 습작 -
죄책감을 인지하고 우리는 ‘내가 죄책감을 인지한 인간’이라는 그 사실 자체로 기꺼이 우리를 용서한다. 대개의 경우, 죄책감이란 느끼고 포착한 그 자체로 면죄부가 된다.
우리는 ‘괜찮지 않을지도 모른다’라는 한 가지 불안에서 도망가기 위해 습관적으로 ‘괜찮겠지’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안한다. 물론 나에게든 타인에게든 진짜 괜찮은 걸 수도, 아닌 걸 수도 있다. 이조차 명확히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인생에 답이나 원인, 분명한 목적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극복해야 하고, 또 극복할 수 없는 삶의 영원한 딜레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