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감성에세이,애도에세이,살아남은한 인간으로서의 연대기>
살아간다는 것은 ‘왜?’라는 질문과 싸워 나가고, 내가 다 싸워 이겨 왔다고 믿은 게임의 파이널라운드에서 다시 마치 원혼에 휩싸인 괴물 같은 그 ‘왜?’라는 질문과 맞닥뜨리는 일이다. (작게는 ‘왜 ○○을 해야 하지?’부터 시작하지만, ‘왜 눈 떠야 하지?’, ‘왜 살아야 하지?’라고 묻는다면, 현실의 이치상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조건으로 평화롭고 번영할 수는 없으니 상상력이 가닿는 주변인들을 포함한 ‘나’ 자신의 ‘평안’을 기도할 수밖에 없는 운명 앞에서 번듯하고 자신만만한 답변이나 논리적 당위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질문을 이길 수 없다. 늘 덮어 두는 것뿐이다. 가장 쿨한 대처법은 질문하되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죽을 순 없잖아?”
최근 예전에 국내에서 그 제목이 한창 회자될 때 다운받아 둔 의학미드 <그레이 아나토미>를 우연히 틀었다 뒤늦게 빠져들었다.
많은 사람이 이 드라마를 사랑하는 이유는 앞선 글에서 언급한 폴의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서 우리가 대리체험한 것처럼 생, 사가 오가는 현장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선택 등 우리가 살면서 결국엔 마주해야 할 문제들을 오색빛깔 무지개처럼 미리 체험하고 상상하게 한다는 가치에서 비롯한다.
그중 척추가 반으로 구부러진 모양새로 굳어진 아이가 나오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워낙 큰 수술이라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설명 앞에 엄마는 아직 어린아이를 그런 위험, 수술에 처하게 둘 수는 없다고 얘기한다. 그때, 아이의 나지막한 대사에 모두 침묵한다.
“엄마는 아직도 죽는 게 가장 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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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서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내가 아플 때만큼, 내 삶의 모든 일들이 꼬여 있고 잘 안 풀려 죽기 직전으로 괴로울 때만큼, 너무 비상식적인 이유와 사건들로, (육체적, 정신적, 상황적으로든) 관용하기 힘들 수준으로 나 외에 아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주해야 할 때 실은 세상에 대한 오해가 더 깊어진다.
‘대체 이렇게까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왜지?’
무척 무책임한 발언이긴 하지만, 그건 어쩌면 내가 지금은 그저 ‘목격’하기만 하는 그 모습들이 미래의 내 모습이나 내 주위 사람의 모습이 될지도 모르다는 잠정 아래 이뤄지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전혀 나의 일이 되지 않을 것이라면 잔인하긴 해도 사실 크게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단계들이 무수한 종교인들이 말하듯 ‘신의 선택적 설계이자 뜻’이라면 개별의 시차를 제외하면 인간이 가진 유일하게 동등한 조건인 삶과 죽음 외에 부차적인 삶의 과제들은 왜 선별적으로 각자의 삶에서 체현되는 것인지, 그 선별적인 삶의 사건들이 만들어지고 부여되는 기준은 무엇인지, 과연 고통받는 자 앞에서 당당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고통과 지금 자신이 앓는 것 중 최상이라고 꼽는 고통을 당장 그 자리에서 바꾸라도 말해도 신의 뜻이라면 응당 옳다고, 자신이 받아들이고 이해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저, 그 고통이 자신에게 오기 전에 예방하거나 정신을 무장하기 위해 무언가에게 미리 소원을 빌어 두고 믿음을 두둑이 쌓아 두어야 하는 건 아닐까?
마치 내가 어릴 적, 나아가 지금도 ‘치과’라는 괴물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나는 아직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어렸을 때, 난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치과를 무서워해. 그곳은 너무나 비인간적이지. 그런데 하나님은 왜 치아를 만들고, 그 치아를 또 썩게까지 해서 그 고통스럽고 무서운 곳에 우리를 기어코 가게 만드는 거지? 다른 건 다 참을 만해. 하지만 이 설계는 너무 이상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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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설계를 운운한 건, 어렸을 때 나는 우스울 정도로 지나치게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나는 나에게는 언제나 파라다이스나 다름없는 교회에 나가자는 제안에 요지부동인 한 친구를 꾀기 위해 내가 불교와 기독교를 모두 믿어 봤는데 그중 기독교 교리가 제일 진실에 가까웠다고 ‘거짓말’했다. 신실한 신자로서 불교 체험은 내게 있을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도대체 왜 그런 미친 거짓말을 했던 건지 전혀 이해되지 않지만, 그땐 교회를 택하지 않는 그 친구가 뻔히 보이는 답을 선택하지 않는 기이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사실 지금의 나는 삶이 ‘반드시’ 살아내는 일, 그 ‘복무’ 자체에 무조건적이고 100% 완전하고 신성한 목적이나 목표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삶에서 이루고 싶은 자신만의 과제와 과업이 있다. 그게 공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우리가 태어나 들이쉬고 내쉬는 숨의 횟수만큼, 눈을 깜빡이며 대하는 모든 사물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횟수만큼, 끊임없이 휘발되고 차오르는 시계의 운동성만큼 생성되고 증발되는 꿈이자 고유한 자신만의 세계, 대기가 존재한다. 그것은 개개 사람에게 하나의 유일한 생명이자 분위기로 존재하는 데다 태어나면 평생 영위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존재’다. 나보다 더 ‘존재적’인 것이며, 고로 나보다 더 존재적인 그것의 ‘목적’이다.
그 과업에서 스스로 필연적인 좌절을 겪었다고 여길 때, 그 좌절을 이겨낸다거나 다른 맥락의 삶적 호응이 도래할 거라고 여기기 힘들 때, 혹은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목격했다고 판단할 때, 그 감정들과 시선들을 더는 없는 듯 호위하며 살아갈 수는 없겠다고 문득 냉엄하게 느꼈을 때, 기타 나 역시 겪어 보지 못했으므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이유들로 사람이 스스로의 생명을 져버리는 일을 ‘선택’할 때, 그걸 이 세상에 남은 우리가 무작정 ‘잘못된 선택’,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감히 정의할 수 있을까?
그조차 그 인간의 개인적인 선택이고 숙고한 결론이라면, 당연히 그 길을 장려해서는 절대 안 되겠지만, 함부로 그의 미래에 희망이 존재했을 거라고 ‘스스로’ 해석하여 예단하는 일 역시 조심스러워야 한다. 나는 그가 아니고, 그는 내가 아니다. 여기, <숨결이 바람 될 때>의 저자 폴은 말한다.
"환자의 삶과 정체성은 우리 손에 달렸을지 몰라도, 늘 승리하는 건 죽음이다. 설혹 당신이 완벽하더라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나는 죽음과 마침내 대면하게 되었지만, 아직 죽음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중략) 보이는 거라곤 텅 비고, 냉혹하고, 공허하고, 하얗게 빛나는 사막뿐이었다."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환자를 실수로 죽일 뻔했다는 극 중 의사 양에게 오웬 역시 이렇게 말한다.
"나도 모든 걸 다 알진 못해요. 그건 다들 그렇죠. 그래서 실수를 하고 그러면서 배워야죠."
‘알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그 답을 찾는다는 목적으로 이 삶을 항해하는 유일한 이유지만, 결국엔 아무도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답을 만난다 해도 이미 죽은 후이므로, 설파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이지 ‘답’이란 가끔 무슨 단어인지조차 의심스럽다.
더 본원적으로 말하자면 생과 사의 신비를 설명할 뚜렷한 답이나 비전이 정말 있는 거라면 이 땅의 종교가 인간의 야욕을 위해 이처럼 본질을 수많이 변형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지 않은 몇몇의 종교인들과 그 집단이 때로 ‘진실’의 이름으로 행하는 혼돈과 논란의 행적들은, 곧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의 혼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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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의 책을 반 정도밖에 읽지 않았을 때 이미 나는 이러한 ‘알 수 없음’에 대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내겐 꽤 오래되고 깊은 우울증의 주기가 있다. 솔직히 나는 그간 이게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내 삶에 이 감정은 오래전부터 어떤 디폴트 값 같아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에 가깝다. 또, 개인적인 연유에서 단언하건대 그다지 답이 없는 문제기 때문에 문학이나 글을 통해 자전적으로 치료하길 고대했다. 본래 나에겐 그러한 힘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글에 자주, 치밀하게 미안하게도 글은 이러한 감정의 정화제보다는 상시적인 기폭제가 되고는 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닿지 못할 때마다 그 감정은 더 심화됐다. 그 기간은 한없이 길어져 갔다.
문득 이러한 디폴트 값에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고민하던 어느 날, 나는 나의 감정적 고통을 마치 제삼자가 바라보듯 방관만 할 것이 아니라 저속히 관찰해 보고자 마음먹었다. 흐릿한 최소한의 윤곽으로나마 감정의 물리적 실체를 알고, 형체를 만나 보고 싶었다. 나는 감정이 극심하게 바닥으로 치닫는 날이면 다이어리에 ‘Deep blue’라고 적어 그 리듬을 알아보고자 했다. 분명 내 증상에는 맥박과 같은 주기, 심화와 완화라는 강도가 있었다. 일정하게 오고, 떠났다.
하지만 이 결심도 혼란스러운 감정의 여과기를 장착하고 사는 한 인간으로서 때론 까먹고, 때론 이 일에 적대적이 되어 그런 것은 그다지 기록할 필요가 없다고 야멸차게 결론지으며 무시하는 것으로 어쩐지 늘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최근 몇 개월 간은 밤에 아파트단지 끝자락에 마련된 개천 코스로 러닝을 나갔고, 계곡을 따라 일직선상으로 펼쳐진 트랙을 미친 듯이 바삐 뛰거나 굳은 신념을 두 손에 말아 쥔 듯한 자세로 힘차게 활보하는 ‘삶에 대한 의문 없음’으로 무장한 듯한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지키고 싶어 하는 무수한 계획들에 완전히 탈진해 버린 나는, “대체 삶이란 무엇인가, 이들은 무엇 때문에 야밤에 이곳에 나와 이렇게 열심히 뛰고 있는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외마디 비명이 곁들여진 소용돌이에 한참을 휘말려 있곤 했다.
솔직히 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조차 그들 중 한 사람이면서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이 밤에 개천에 한 뭉치로 나와 있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었다. 우리의 잘 살고자 하는 마음이나 희망, 욕망의 근거, 근원이 너무 욕심 사납거나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우리 삶의 관심이 점점 더 ‘좋은 삶을 사는 방법론’으로 증폭되어 가는지 야밤의 러닝 인파는 하루하루가 더해지며 피난 행렬처럼 늘어나고, 북적이고 있었다.
‘이 정도면 피난 행렬 아닌가?’ 나는 자조하며 그 대열의 한 사람으로서 의무적으로 걸었고, 그들이 무얼 생각했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내내 이 삶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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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운동을 무척 신성시 여겼고 그 생각은 변함없지만, 그것이 아무리 좋은 정신적 목적을 가졌고 그만한 결과를 빚어내도, 외적으로 구현되는 바가 전혀 없다면 동기부여가 안 돼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운동은 정신적, 몸의 기능적인 정비인 동시에 육체의 외적인 보상이다.
다만 운동에 심취해 무릎의 쓸모를 버려 회사까지 정리하고, 백수여서 더 바쁘고 골이 썩는 나날 속에서 여태 관리해 온 대로 운동을 지속해야 한다는 강박과, 다친 탓에 예전처럼 제대로 하지 못해 스트레스받는 일상은 나를 다소 지치게 했다.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는데, 시간을 욱여넣어 운동해야 한다는 강박과 나쁜 몸 상태로 어떤 운동을 할지 즐겁지 않게 고르는 일과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모든 걸 완수부터 하려 하는 페이퍼적이고 기계적인 생각들로부터 온전히 도망칠 피난처를 찾길 원했다.
물론 그러한 안에서는 언제나 미약한 설렘과 얕은 긴장감, 역동적인 희망 같은 감각이 뒤섞여 있었다. 운동이 주는 쾌감은 적어도 운동하는 그 시간만큼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무엇도 아닌 인간이어도 족하다는 허락이자 계시에 있었고, 하루 중 잠시뿐이지만 나는 그 시간 동안 나라는 인간이자 잡다한 생각들이 이 세상에서 휘발되는 환상 현상을 경험했다.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운동은 나의 정신을 지키는 하나의 도구였다.
글쓰기가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성질들인 정신을 지키려는 ‘불필요한 시도’(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대부분 유형의 도움이 안 된다는 점에서)라면, 운동은 강인해지려는 시도가 아닌 ‘무장’ 그 자체였다. 내가 직접적으로 무기나 쇠, 철이 되는 기분이었고, 머리 아픈 계획도, 거시적인 생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20분 더’, ‘한 바퀴만 더’ 등의 한시적이고 유일해서 그것으로 올곧게 완벽한 목표만 존재했다.
나는 나도 삶에 대한 (물론 긍정적인 동기와 감정들을 전부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들 중에 가장 추잡한) 욕심으로 밤이면 어떻게든 어두운 얼굴을 가릴 활주로로 기어 나가 뜀박질을 시도하는 장본인이면서, 함께 뛰는 ‘의문 없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도 그 인파를 피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달려 보기 위해서라면 자전거 활주로쯤은 눈치껏 적당히 침범해도 아무도 나무라지 못할 터였다.
이 감정이 심화되고, 나 역시 왜 그렇게 운동에 집착하고 수행해야 하는지 알 수 없던 어떤 시점에는 ‘그저 주어진 혹은 계획한 상황에 집중해 아무 생각 없이 뭐든 행하는 것이 최고야!’라고 몇 분 전 스스로를 독려하던 것과는 달리 금세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얼굴이 사색으로 바뀌어 죽음을 생각했다. 헛되이 턱이 높은 돌계단 저 위로 쓰러지듯 기어올라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처럼 내 눈앞을 달려 나가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정말 미안하고 감사하게도 난 죽음을 앞둔 폴의 이야기로부터 삶의 의미를 다시금 진지하게 이해했다. 그는 의사인 과학자이자 문학도였다. 묘사하자면 세상을 탐구하는 가장 궁극적인 방법론인 두 학문을 사랑했던 사람, 의술로서 생명의 신비에 가장 깊게 다가서고 그 실체를 목격해 보려고 목표한 사람, 그러다 정말 일찍 죽음까지 만나 버린 사람, 자신의 남겨진 삶도 이 의미를 마저 증명하는 데 아낌없이 쓰기로 계획했던 사람, 죽음의 형체를 목전에서 보고 마지막까지 ‘알 수 없다’며 ‘알 수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기술해 나간 사람. 그러니까, 이런 사람조차,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다.
그렇게 보니 산다는 건 그냥 ‘이유 없음’이었다.
정의하고 나니 모든 것이 너무 명쾌해졌다.
그 누구도 일상에서 매일같이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 열렬히 토의하고, 그 무갈피에 상심에 젖을 수 없는 이유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누구도 정확히 내리고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전 인간의 암묵적 동의 때문이다.
우리는 회사에 출근해, 혹은 아침에 일어난 가족들과 얼굴을 처음 마주 대한 식탁에서, “그런데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 “우린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오늘 기쁘게 살아야 해, 하하!”, “엄마,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가?”라며 일상적으로 묻고 대화하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중요하며 유일무이한 삶의 단 한 가지 이 핵심적 질문은 모두 삶의 공통주제임에도, 단 한 번도 사회나 가정 내에서 공식적이며 가벼운 대화의 주제나마 되는 법이 없다. 월례회의를 치러 논의해야 마땅한 주제임에도, 금기에 가까운 것이다.
내가 만약 무구한 얼굴로 엄마에게 갑자기 위의 질문을 던진다면 엄마는 무척 당황할 것이다. 질문한 내가 아주 미안하고 난처하게. 내 동생이 내게 묻는다면, 난 홀로 무수히 묻고 대답해 준비한 만큼 따뜻한 독려는 해주겠지만, 역시 첫마디는 “글쎄, 나도 모르겠어”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다시 저녁 러닝을 나간 날, 늘 갑자기 튀어나와 날 기겁하게 만들던 여름 풀밭의 장구벌레조차도 ‘왜 여깄는 거지?’라고 묻게 만드는 대상이기보다는 그저 모든 것들이 응당 있어야 하는 자리에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뛰는 사람도, 열심히 걷는 사람도, 너무 많이 뛰어 지친 사람도, 비를 맞으면서까지 운동하는 사람도, 아이도, 엄마도, 아빠도, 주변의 갖은 사물도, 가로등도, 생명도, 내게, 혹은 모두에게 유해해 보이는 모든 것들도, 그들의 의지, 그밖에 모든 당위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다소 길던, 또 한 번의 ‘Deep blue’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그냥’ 하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질문 없이.
나는 러닝을 나가기 전엔 늘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지?’라고 물었었다. 그 질문 때문에 무얼 해보기도 전에 이미 진이 다 빠졌었다. 하지만 뛸 거라면, 조금이나마 하고 싶다면, 그렇게 묻지 말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가서 뛰거나 못하겠으면 누워 편히 쉬면 된다. 살기 힘들 땐, 그냥 이유를 묻지 말자.
너무 많은 질문과 이유 찾기는 명쾌한 해석보다는 되레 불필요하게 무거워서 우스운 상심만을 유발한다.
우리에게 삶을 살아야 하는 각자의 이유나 사명은 사실 꽤 부차적인 문제다. 그냥 ‘살아야 해서’ 사는 거다.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만 마땅한 것도 아니고,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없다면 틀린 거라고 타인에게 강론할 권한도 없다. 없어도 좋지만 있어도 좋다. 그렇다고 있어야만 반드시 더 좋은 것도 아니다. 사람, 사물, 취향을 호가하던 의미는 그 대상, 혹은 나의 소멸과 함께 언젠가는 사라진다. 반대로 말하면 이는 ‘살아야 할 의미가 있음에도’ 세상을 등져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인 제도가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충분하고 촘촘해 적시에 필요한 사람에게 가 닿는, 사회적인 도움이나 제도, 주변 사람의 따뜻한 보살핌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한 사람이 30, 40, 50살이 될 때까지 누군가 지속적으로 곁에서 삶의 의미를 대신 찾는 보조자 역할을 해줄 순 없다. 그건 결국 자기 스스로 찾아야 마땅한 옥토인 것이다. 주입해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즉, 1,000번을 죽고 싶더라도 사는 이유는, 그 1,000번을 넘어 단 한 번 실낱같이 찾아오는 살아야 할 이유에 대한 ‘목격’과 그로 인해 흐릿하나 점점 선명히 ‘각인’되는 사명감에 근거한다. 이것은 매우 유약하지만, 그만큼 강하기도 하다. 1,000번의 허무와 맞서 이기는 힘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글을 생각하며 이 1,000번의 혼돈을 넘어왔다. 이 1,000번의 혼돈 앞에서 나를 다잡은 건 반드시 내 글, 정확히는 내가 만든 내 글 속 생명들을 마지막까지 벼려 이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는, 내가 만들었으니 그들에게 제대로 된 생명을 꼭 주고 말아야 한다는 강철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마음은 매우 유약하기도 해서, 출간의 방식과 당위 앞에 번번이 나를 쓰러뜨렸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나는 너무 많이 흔들렸다. 바꿔 말하면, 글을 공개하려는 마음 때문에 되레 죽고 싶은 생각이 1,000번 든다면 그래도 1번 정도는 ‘살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또 다른 내 친구는 고양이를 돌보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 나간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다.
사실 엄청난 삶의 신비 때문에 사는 사람만큼 세상의 원리에 대한 큰 의문이나 호기심 없이도, 그저 마땅히 죽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혹은 자신의 선택 뒤 남겨질 사람들의 마음이 우려되기에 몇 번의 위기와 의혹을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는 조심스러운 예측밖에는.
우리는 삶에 대해 알 수 없다. 이 영원한 진실을 대체할 사실은 없다. 그래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다’(라고 살고 싶은 본능이자 속수무책적 욕망을 종종 도덕계적인 차원으로 격상시킨다). 즉, 삶은 그냥 어설픈 본능인 것이다. 또, 불필요한 소음을 굳이 낳고 싶지 않은 성가신 마음도 삶의 해사한 미소 속에 숨은 암울한 마음 중 하나다. 그러나 1,000번의 절망 앞에서 기꺼이 남은 삶을 기대하고 복무하게 만드는 1번의 희망은 가령 이런 것이다.
글에 관한 어떠한 영감이 떠올랐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설마 이 글을 다 쓰기도 전에 내가 죽는 건 아니겠지? 그런 비극이 있어서는 안 돼!’
상습적이며 표리부동한 이 생각 때문일까?
정말 죽기도 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 전에 늘 죽음을 걱정하는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미완으로 끝날지도 모를 글을 필사의 마음으로 써 내려간 폴에게 부조리하게도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