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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책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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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writer May 26. 2022

산책일기 1. 느린 속도의 빠른 묘약

연재 에세이





매일 걷는 길이고 풍경이니 오늘은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길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또 이런 사진을 찍고 말았다.

의자의 뚫린 틈을 타고 솟아오른 한 폭의 생명력이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맑은 기운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산책은 느린 묘약이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만끽하며 내 생명의 속도와 성장세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흐른다.


산책이 습관이 아니던 시절에, 답답한 마음에 밤거리를 거닐고 집으로 돌아오다 활기찬 생각들로 가득 차게 된 나는,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산책이란 참 신묘해. 어떤 답을 구하고자 나온 것이 아닌데, 전혀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던 것들, 그래서 심지어는 저 멀리로 치워두고 잊은 일들에까지 생각해 본 적 없는 방향의 생각을 제시하거든.'


물론 그 아이디어를 실현 가능하게 만들었느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 신선함에 산책을 새삼 달리 봤던 경험이 떠올라 말하는 것이다.


사실, 산책을 하면 새로운 아이디어와 마주한다기보다 풀리지 않던 일들을 직시하고, 그 일들의 순서를 매개하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얻는 것 같다.

또, 감정을 순화하고 부드럽게 연화하는 시간을 얻는다.

즉, 내가 갇혀 있던 땅굴의 위치가 어디인지 GPS로 추적하게 되어 '아, 이것부터 해결해야겠구나', 혹은 '아, 이런 마음은 털어버리고 이런 시각으로 접근하는 게 옳겠구나' 하는 식으로 같은 감정과 문제를 전혀 새로운 시야로 바라보게 된다. 매번 이러한 선물을 얻으면서도 산책을 떠나기 전에는 문제가 해결되고 답답한 마음이 해소되리라는 기대심리가 조금도 없다. 답답하다는 감정 자체가 주는 맹점이 바로 그러한 고립감이 아닐까. 매번 배우면서도 매번 잊게 만드는 것. 그러니, 한 시간가량의 나들이가 주는 선물치고는 굉장하다. 자동화기계처럼 매일 되풀이할 가치가 있다.


폭염의 징조가 보이며 요 며칠 시골도 아닌데 어디서 개구리 소리라도 들릴 것처럼 날이 무덥더니 오늘은 퍽 선선했다. 

출발할 때부터 날이 흐려 우산을 챙겼는데, 산책을 하고 천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조금 앉아 있다 집에 돌아오는 중간에는 마침맞게 비가 왔다.

우산을 챙겨 나간 나는 우산을 펼쳐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안온함보다는 우산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 문제를 받아들이고 행동하는지를 먼저 지켜본다.


러닝을 하는 사람들은 땀으로 젖은 것과 빗물로 젖는 것이 같은 것과 진배없어 이전의 운동을 계속하며 단지 집으로 방향을 바꾼다.

오히려 비가 오면 청량하기까지 하다. 나도 딱 한 번, 비를 맞아보며 러닝을 해본 적이 있어 안다.

단정하게 외출복을 차려 입고 양손 가득 장까지 봐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쉬기 위해 돌아가던 사람들은 누가 듣든 말든 '으휴!', '에이씨!' 하는 짜증 섞인 한숨을 토해내며 이전에는 낼 수 없던 속도로 걸음에 박차를 가하며 내게서 멀어진다.

그 떠나가는 굴곡을 보면, 대충 나와 동선이 비슷할지 아닐지를 알 수 있다.

가끔은 이렇게 예고 없이 비가 올 때 우산을 씌워 함께 갈 수 있는 만큼 처음 보는 사람들을 집의 어귀까지 바래다주는 일을 한다면 어떨까 상상한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침묵하며 걸어도 괜찮다.

유머나 농담, 감사, 깊은 유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곁에 자리가 남기에, 그리고 우산을 챙긴 것은 나의 우연이기에, 그 별 볼일 없는 우연을 똑같이 대단치 않게 나누고 싶은 것이다.


비는 몇 분 내리지 않고 총명한 기분이 된 나는 다시 집 앞에 다다랐다.

우산은 잠시지만 요긴하게 쓰였다. 느린 생각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하지만 가끔씩은 산책에도 운동의 효율이 필요한데, 그것은 모든 것은 최소 시간 내 최대 효율로 마감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퍽 현명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느림의 미학을 예찬하면서도 그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음엔 속도를 내자.'


다짐한다.

질도 중요하지만 계속 양의 싸움에서 뒤처지면 질을 손보는 일조차 불가해진다.


산책은 늘 해결할 수 없는 것들에 힌트를 준다고 말했다.

지금도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산책일기'라는 아이디어를 얻어 이렇게 집에 돌아오자마자 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일거리가 하나 더 늘기는 했지만, 스케치하듯 짧은 글들도 많이 쓸 것이다.

되도록, 산책처럼 간결하게.


오늘 산책은, 흐린 하늘로 인해 들과 꽃과 천과 하늘과 천과 천 사이를 건너는 다리를 비롯한 모든 구조물들이 전혀 다른 풍경으로 고무됐다.

어제의 모습을 떠올리니 같은 장소라고는 믿기 어려운 정도였다.

'이런 날 집에 돌아가 다시 일을 시작하려면 꽤 신비로운 기분을 느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집 앞 어귀에서는 오늘로서 두 번 본 듯한 기억의, 후드티를 뒤집어쓴 남자아이 한 명과 그 곁에 휠체어를 탄 여성을 또 보았다.

둘은 아파트 앞 화단 가두리에 앉아 있었다. 지난번과 같은 장소였다.

휠체어에 앉은 여성은 뒷모습만 보았지만, 아마 아이의 가족, 그중에서도 어머니가 아닐까 싶은 느낌이다.

잠깐이지만 간병을 해보아서 가족을 간병할 때 형성되는 특유의 분위기를 약간은 알고 있다.

아픈 사람을 데리고 잠깐 바깥바람을 마주하러 나왔을 때의 '그래, 여기 있었어' 싶은 반갑고도 선선한 해방감과 희망에 대한 의지, 그럼에도 목마른 자유, 협소한 환경 안에서의 사랑과 여유, 가끔은 불길한 내면의 이타 같은 복합적인 감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예단일 뿐이다. 그 둘의 관계조차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운동복을 입고 커피숍에서 테이크아웃 한 커피를 든 내가 느리고 꼿꼿이 그 앞을 지나치는 것을 그 남자아이가 지난번과 다르게 바라보는 듯하여,

내가 슬펐듯, 나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함부로 규정짓고 아프게 하는 일은 부디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나 역시 내 안에서 아주 잠시간 해방되기 위하여 잠깐 바깥을 거닐러 나갔던 것뿐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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