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근 Sep 21. 2021

흑백 사진

서로를 사랑하는 서로의 방식

서울숲역 4번 출구로 쭉 걸어 나왔다. 신호등을 두 개 건넌 뒤 편의점을 끼고 돈 골목길에서 그녀가 걸어왔다. 그녀는 근처 옷가게에서 상의와 하의를 급히 샀다며, 어쩔 수 없었다는 눈빛을 생긋 보냈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겨우 감추며 싱긋 웃었다. 사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사진 찍는 날이니까.


위치를 미리 봐 둔 그녀가 내 손을 이끌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분명 찾지 못했을 것이다. 간판도 없던 그곳은 흑백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스튜디오였다. 흑백의 담백한 맛이 좋아 예약해 두었다. 스튜디오로 들어서니 흑백 사진을 닮은 사진사 분께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우리의 장난스러운 불평에, 사진사 님은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간판이 없다고 답하며 우리에게 의자를 건네주었다.


사진사 님은 생글한 목소리로 사진을 어떻게 찍을지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검은 배경과 하얀 배경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그녀는 자신이 산 옷을 살며시 꺼내 보였다. 상의는 검은 바탕에 희고 큰 점들이 군데군데 있는 블라우스였고, 하의는 복숭아뼈 위까지 오는 갈색 치마였다. 검은 배경을 고르면 그녀의 얼굴과 흰 점들 둥둥 떠다닐 게 분명했다. 우리는 만장일치로 하얀 배경을 골랐다.


사진사 님은 사진 찍기 전 우리에게 얼마나 만났는지 물었다. 그래야 어떤 포즈까지 해낼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이제 3년 반을 넘겼어요.” 그 세월을 발음할 수 있음에 나는 묘한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하나 더, 사진사 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얼굴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는지 물었다. 나는 오른쪽 얼굴이 더 좋아서 왼쪽에 서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왼쪽에, 그녀는 오른쪽에 섰다. 이것이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녀는 꽤 쑥스러워했다. 카메라 프레임 속이면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곤 했지만, 오늘따라 더 쑥스러워했다. 사진사 님의 노련한 지시와 달콤한 칭찬에도 그녀는 어느새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있었다.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겠다는 곧디 곧은 나무가……. 그래도 좋았다. 그녀가 어떤 나무든 아무렴 좋았다. 나는 아름다운 노래를 지저귀는 새가 될 수도, 그렇다고 선명한 색을 내뿜는 꽃이 될 수도 없었다. 대신 나는 새가 잠들고 꽃이 졌을 때도 묵묵히 불어 주는 바람이고 싶었다. 나는 그 마음을 담아 담담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10여 개의 포즈, 300여 장의 사진을 무사히 찍었다.



우리는 사진관을 나오며 작년 2월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때 처음으로 둘이서 흑백 사진을 찍었었다. 나는 스마트폰에서 그 사진을 찾았다. 1년 8개월 전의 우리가 생각보다 더 어려서 킬킬 웃고 말았다. 그 사진 속에서도, 바로 지금 여기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손을 꼭 맞잡고 서로의 미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바람이 흑백 사진처럼 담백했다. 우리는 서울숲역 4번 출구로 함께 걸어 들어갔다.




[후기]

나는 이제 그녀의 남편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다시 기념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사진관은 이미 없어진 뒤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리얼 한 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