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부모는 내가 집에 있는 꼴을 못 보던 사람들이었다. 중학교 이후로부터는 집에서 휴식을 취한 게 언젠지 기억이 안 난다. 나는 늘 도서관이나 학원, 학교 등 외부에 장소에 있었고 집에 있으면 ‘좀 나가지 그러니’이런 말을 계속 듣고 자랐다. 그래서 집은 내게 편한 장소가 아니다.
어렸을 땐 타인의 집안 사정이 어떤지 모르니까, 그런 게 디폴트인 줄 알았다.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게 나뿐만이 아닐 테고 실제로 그런 아버지의 강단 있는 태도가 내가 열심히 하는 촉매제도 되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는 주말이 되면 도서관으로 친히 데려다주었다. 공부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던 것이다. 도서관에 가서도 얼마든지 딴짓을 할 수 있었지만, 순진했던 나는 온전히 공부를 하다 돌아오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성적은 항상 우상향해야 했으며, 떨어지는 건 용납이 안 됐다. 그러기라도 하는 순간, 내게 쏟아지는 건 책망과 무시였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독립을 하게 됐다. 회사가 지방이전하면서 자취방을 구해야 했는데, 당시 이천오백만 원이던 방을 계약하고 오니 아버지란 사람이 하는 말이 이랬다. ‘말을 했으면 돈을 줬을 텐데 그런 집을 얻었냐고’ 아버지는 항상 나를 인정하는 말보단 나무라는 말을 했다. 어렸을 땐 그런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고 뭐든지 열심히 했지만 더 이상 학생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부터 내 삶을 꾸려나갔다. 소모품을 내 돈으로 사기 시작했고, 회사에서 겪은 일 또한 부모한테 말하는 일이 없었다. 자랄 때 감정적으로 케어해주지 못한 그들이니 성인이 되어서 자가를 구매하거나 여행을 하거나 차를 구매할 때 그들의 조언이나 의견은 필요 없었다. 직장 동료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가족으로부터 조언을 얻는 걸 보면 ‘그건 그들의 사정이다’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본가에 가는 일도 잘 없었다. 어버이날이나 생일 같은 때에 찾아가지 않자 ‘그래도 생일 땐 와야 하지 않겠니’라고 부모는 말했지만, 그들 또한 내 생일은 챙겨준 게 아니었다. 삶은 많은 부분 기브 앤 테이크라고 생각하면, 그들은 한만큼 받는 것이었다. 그래도 회갑은 챙겨야지 하며 갔을 때 그가 한 말은 ‘대학원 지원해 줄 테니 가라’라는 말이었다. 그 말에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게 뭔지는 없었다. 그저 남들보단 잘 나갔으면 하니 박사를 하라는 거였고 남들이 결혼하니까 ‘결정사 지원해 주겠다’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가에 가면 충만해진 마음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항상 마음이 답답해져 돌아오곤 했다. 그들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원하는지를 알려고 하기보다 어떤 사회적 절차에 따라 날 끼워 맞추고 싶어 했으며 그들이 주고 싶은 걸 주려고 했다. 음식을 바리바리 싸줄 때도 ‘이미 준 것도 다 먹지 못했어요’라고 거절하기 일쑤였지만, 그럼 그들은 그 말에 대응하지 않는 걸로 섭섭함을 표현했다. 부모가 몸을 갈아 넣어서 날 키워준 것에 대핸 감사했지만, 그것조차 ‘그들의 의무였기 때문에’ 그렇게 해놓고선, 키워놓고 나니 ‘싹수가 없다’라고 막말을 해대는 것도 지겹다.
그 또한 부모에게 감정적 케어를 받지 못했고, 자수성가했으니 그래도 경제적 지원이라도 받은 나는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여기는진 몰라도 그들의 헌신적인 태도나 자기 우월성 같은 걸 바라보면 ‘그들 또한 인간이니까’ 받아들여야 한단걸 알면서도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핸 ‘?’가 든다. 나 또한 자식을 낳으면 그들에게 돈이나, 감정적으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분명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자식이 어른이 되었을 때 (그들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걱정을 부담스러워하고 나 또한 (자식에게) 은근히 바라게 되는 부모가 될까 봐 나는 아직도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