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대전까지 갔다. 이것 때문에 어제 괜히 걱정이 됐다. 학교문이 안 열렸으면 불법주차 해야하나 어떡하지 했지만 열려 있었다. 주차장이 거의 차 있었는데 괜히 학교뒤편으로 갔다 날 따라 차가 다 들어오는 바람에 지정좌석 옆에 주차해야 했다. 그냥 학교선생님들이 주차하는 자리에서 했어도 될걸 돌아간 셈이다. 가서 시험을 보는데 갖고간 과자로 당을 충전했다. 시험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달려오고 있는데 여동기가 전화가 왔다. 오늘 만나기로 했었다. 어제 과음하고 카페에 들어와 있다고 했다. 거기로 가니 그녀에겐 술냄새가 났다. 가게에 가기엔 남동기가 안와서 카페에 들어가 있기로 했다.
시험기간은 끝났다고 했다. 회사에 다니다 학교에 가겠다고 그만둔 친구였다. 남자 친구가 말레이시아 골프여행을 떠나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잔다고 했다. 신메뉴를 먹어보고 싶었는데 디카페인이 안된다고 해 몇 번이 곤 메뉴를 바꿨다.
그녀는 원래는 졸업할 시기인데 학교에서 인증절차를 완성하지 못해 강제 1학기 더 다닌다고 했다. 그럼 학교에서 수업료를 부담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우린 화장을 하며 이야기를 했는데 화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흥미로웠다. 혼자 유튜브를 보던 남자가 우리 옆테이블로 자리를 옮겨왔는데, 햇빛 때문인지 아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 건지 모르겠어서 이어폰을 끼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는데 고개를 돌리는 게 너무 노골적일 거 같아 결국 확인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제 술을 먹다가 아버지 이야기를 하다가 화가 났다고 했다. ‘나도 아버지 싫은데..’라고 했지만 구체적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집들이를 원래 가려고 해서 선물을 사놨는데 결국 취소돼 선물만 전달했다고 했다. 4차까지 이어진 술자리는 결국 집까지 술을 사서 가는 걸로 됐는데 본인이 막내여서 편했다고 했다. 청첩장을 돌리려 만든 자리의 주인공은 애초에 집에 갔는데, 술을 죽자고 마시는 여동기가 이해가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했다. 나도 20대엔 그랬으니 이해가 되지만 지금 나이에서 보면 무모해 보이는 것이다.
남자 친구와 캠핑을 다녀왔다는 아이는 우중캠핑을 했다고 했다. 차박을 했다고 하는데 바비큐도 구워 먹었다고 했다. 난 차박은 좀 그런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며 비건에서 다시 고기를 먹는 걸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때쯤 남동기가 마저 와서 식당으로 향했다. 처음에 식사시간을 12시 반으로 예약했다가 우리 둘이 만나는 시간이 11시 반이라서 다시 예약을 취소했다고 했다. 결국 12시 반으로 예약을 다시 했다. 그럴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만나서는 아직도 누굴 만나고 있지 않은지 여동기가 우리 둘에게 물었다.
난 헤어진 지 4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남동기는 회사 내 비서에게 고백했다가 비서가 전 남자 친구와 재결합하며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말았다. 고백을 할 당시에 남동기는 해외출장을 다녀와 선물을 우리 동기들에게도 줬지만 비서에게도 줬는데 그때 관심이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동기가 비서에게 고백했다는 사실을 건너 알게 되었다. 결국엔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었다. 미리 물밑작업을 했으면 소문이 나지 않았을 텐데 생각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어젠 뭐 했어?- 남동기가 물었다.
비서언니 만났지.- 동기 여자애가 말했다.
비서 이야기가 나오자 남자애는 급격히 화제를 돌렸다. 과거에 사내 비서와 결혼한 남직원이 있었다. 그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비서는 인기가 많았다. 반반한 얼굴에 두루두루 잘 지내는 스타일이었다. 비서는 처음에는 나와도 잘 지냈다. 하지만 나와 약속을 당일 갑자기 어머니일 때문에 안 되겠다고 해서 손절했다. 그동안 퇴근 후에도 연락을 할 만큼 친하다고 생각했고, 비서실에 가서 노가리를 까기도 했었다. 하지만 한순간의 일로 사이는 멀어졌고 그 이후로 비서는 내게 청첩을 가져왔지만 축의도 안 하고 가지도 않았다. 그 이후엔 일적인 일로만 대화하고 되도록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여동기가 내려온 거여서 밥을 먹곤 보드게임방에 가기로 했다. 밥은 오랜만에 먹는 양식이라 맛있었다. 예전에도 내가 일정이 있어 그 둘이 먼저 만나고 있을 때 보드게임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난 보드게임을 좋아하지 않았다. 최근에 도쿄 다녀오며 낯선 이와 한 오목게임이 보드게임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했다.
-가자.
그 둘은 ‘보드게임 싫어하잖아’라고 말했지만 가자고 했다.
위치는 2km 떨어져 있었고 각자 차를 가지고 와서 따로 이동해야 했다. 가보니 잼민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베가스라는 게임과 칼 꼽기 게임을 했다. 베가스는 돈을 버는 게임이었는데 주사위가 나오면 6개의 섹션에 둘 수 있고, 각 섹션엔 5만 원 이상의 돈이 포진되어 있다. 주사위를 많이 놓으면 되는 게임이었다. ‘머리를 식히러 간 건데 머리가 아파오는’ 걸 극혐하는 나는 게임의 단순함에 생각보다 즐겁게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동기는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었다.
알고 보니 다음 스케줄인 영화예매를 하고 있었다. 임직원복지사이트를 이용하면 싸게 예매할 수 있다고 아까 말했는데, 그걸 계속하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예매는 되지 않았고 이유는 풀스크린인 경우에는 예매할인이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지역사이트에 들어가서 저렴한 영화표를 구매하려고 했지만, 이것도 풀스크린이 해당이 안 된다고 해 결국 가서 직접 예매했다. 주말 영화표는 17천 원이었다. 거의 반값이 해당하는 금액이 싸게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영화관에 가서 결제는 내가 했다. 항상 동기가 많은 부분 부담했어서 이번엔 먼저 계산했더니 말리지 않았다. 영화관에 들어가니 기존 앞에만 스크린이 있는 게 아니라 양옆에도 스크린이 있었다. 여자애는 중간에 토하러 갔다.
원래는 남동기와 난 입사초기에 같이 영화를 보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서로의 가능성을 타진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되지 않았다. 예전에 임원이 우리 둘의 사이를 말했을 때 그때도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 단언했었다. 지금도 그건 유효하다. 그 남자애가 비서에게 고백함으로써 더욱 확실시되었다. 비서에게 고백했다가 나랑 잘된다는 건 자존심상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그 남자애한테 예전에 소개팅을 해주겠다고 했을 때도 그는 거절했었다. ‘어지간히 눈이 높군’하고 생각하던 차 그 비서에게 고백을 한 것이었다. 걔도 나름 기준이 있겠지 생각했지만 벌써 그의 나이는 마흔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 또한 서른 중반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십 년이 지났을 때도 이럴 거라 생각하면 타 독서모임에서 만난 마흔 중반의 ‘A’나, 마찬가지로 배우자를 찾기 위해 주말마다 꼬박 참석하는 ‘B’가 생각난다. 나도 그들과 같은 처지지만 애써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그들이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굳이 그 사실을 말하면서 ‘애가 없어도 된다면 가능성이 있고, 아님 없다’를 말하고 오는 나에 대해서도 질린 것이 사실이었다. 막상 그들이 나와 잘될 거라는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는데, 나 혼자 망상하는 건 내 오랜 습관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이런 망상 속에 보내왔고, 이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결혼해야지’하는 친척과 직장선배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듣는다고 하면서 나조차도 그에 동조하고 있는 꼴이다. 하지만 그들의 조건을 수치화하면서 그럴 거면 차라리 혼자인걸 택하게 되는 나를 요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퇴근 후 들어가면 적막한 집이 편하다고 느끼면서도 누군가와 함께 있는 걸 상상하고 있는거다.
이런 부조리함은 삶을 살면서 늘 계속 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