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가면 오다가다 마주치는 아저씨는 날 보면 항상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대꾸하니 그 이후로도 아재는 몇 번인가 인사를 걸어왔다. 아재는 항상 헐레벌떡 뛰고 있는데 어느 날은 친구랑 같이 뛰더니 그날은 혼자 뛰어가고 있었다. '사슴이 뛰는 것처럼 후다닥 정신없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이유' 그 친근함과 보여주는 미소에 '그러게요'말하며 그날 처음 웃었다. 점심시간에 찾은 산이었다. 순간 표정을 짓는데 얼굴근육을 지독히 안 쓰고 있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제 엘베에서 옆집 봤는데 아이를 안고 있더라. 입주초에 서로 과일을 주고받은 사이지만 그 이후로 데면데면 얼굴도 마주치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마주친 것이었다. 스몰토크를 못해서 가만히 있었더니 먼저 아이가 시끄럽지 않냐며 물어왔다. 예 아이 보는데 고생이 많으시지요 내리자마자 '내 에어컨 시공을 돌려 까는 건가'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생각나서 미안하다는 말도 못 했다.
어제는 엘베에서 아이들을 마주했는데 한 아이가 달팽이를 손에 들고 만지고 있었다. 아이들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손을 흔들고 마는데 마주한 어머니가 너무 밝게 인사해서 나도 모르게 인사하고 말았다. 솔직히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보면 '네 고생길이 훤하구나'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든다.
어젠 미칠 거 같아서 22시에 집을 나섰다. 정처 없이 걷는다. 휘적휘적 시선은 강에 고정한 채 걷는다. 지나는 행인들이 있지만 아무도 눈 마주치진 않는다. 퇴근하면 머리가 너무 아프다. 두통이 가셔야 되는데 극도로 예민해 진날엔 퇴근해도 증상이 좋아지지 않아서 일부러 만화책을 보다가 집을 나서곤 하는 것이다. 만화책을 볼 때면 현실을 잊을 수 있지만 빌려온 5권을 모두 읽자 또 머리가 아파왔기 때문이다. 걷기 전에는 주로 추상적인 것들이 떠오른다. 꿈이나 미래,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로 고통받다가 걷다 보면 그런 것들이 신체의 불편함으로 바뀐다. 발이 아프고 다리가 무거워질 때쯤엔 현실에 발이 닫는다. 직업과 돈, 당장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들로.
업체를 선정했는데 그렇게 업체를 조지고 막상 선정할 땐 다른 데랑 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업체가 고생한 것도 알아서 중간에는 그래도 지금 업체가 되면 중 타는 치겠다는 생각에 말을 아꼈다.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최악업체가 뽑히고 나자 망연자실했다. 살면서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은 수없이 겪어왔지만 막상 위원들의 알 수 없는 커넥션들로 이상한 점수를 기재한걸 보니 눈앞이 하얘졌다. 가루가 되도록 까인 지금 업체에 대한 미안함과 앞으로 고생길이 훤할 1년을 생각하니 결국 종이에 손을 베이고 말았다. 이런 날은 단순업무직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이 더 강하겠지.
집에 돌아오자 요리를 할 에너지가 바닥나 한우등심을 구워 먹었다. 맛있다는 생각이 아닌 끼니를 채우기 위한 식사였다. 보스한테 전화가 와서 어쩔 수 없다고 그도 말했지만 무거워진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많이 지친 거 같다. 막상 다음 주 휴가계획을 세워놓고 갈지 말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하지만 잠깐 스톱해야 할 것 같다. 너무 지쳤고 여러 알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휴가가 끝나면 또다시 복귀해야 할 테지만 당장이 급하다. 이렇게 지치는 주기가 점점 짧아져서 이젠 한 달에 한 번은 떠나야 한다. 말이 안 통하는 곳으로 가고 싶은데 결국 국내로 간다. 돈을 아끼기 위함도 있는데 돈에 구애받지 않고 여행지와 일정을 선택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한 달 주식수익이 월급은 되는데 그만두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지만 단 한 달의 수익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오만하다. 내 이야길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돼서 남동생에게 전화했더니 들어줬다. 삶의 많은 순간 '망한 거 같다'라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내일 눈을 떠야 한다는 사실이 터널에 갇힌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