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요가를 하고 있는데 연락이 왔다.
'게임 중'
휴대폰을 집에 두고 가서 확인했을 때 바로 전화하니 그는 받지 않았다.
'공부 중인가 보네'라고 하니 ㅇㅇㅋㅋ라고 성의 없는 답이 왔다. 읽씹 했더니 다음날 연락이 왔다.
'오리는 잘 있어?' 저번주 만났을 때 그가 뽑아준 인형이다. 침대맡에 놓여있는 인형을 사진 찍어서 보내줄까도 생각했지만 과한 거 같아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다. 모른 척했더니 하나 더 뽑자고 한다. 오라는 이야기다. 어제까지는 내밀한 이야기를 쏟아 논걸 후회했으면서, '이번 한 번만 더 믿자'에 가까워진다.
회사일은 나이브하면서 스펙터클했다. 새로 온 인턴은 어리고 예뻤다. '윤에게 소개해주면 좋아할 텐데'생각했다. 하지만 인턴의 왼손 넷째 손가락엔 반지가 껴져 있었다. '어디 살아요. 본가는요. 졸업은요'와 같은 피상적인 대화를 하고 점심에는 후배랑 만나 글 이야기를 했다. 문창과를 나온 후배는 본인이 쓴 시집을 주었다. 저번주에 좋은 생각을 줬더니 보답해야겠단 생각에 점심약속도 잡은 것이었다. 브런치가게를 갔더니 예약이 마감이라 옆 냉면집을 갔더니 만두도 팔고 있어 만둣국을 먹었다. 주말에 뭐 하냐는 화두는 부천영화제로 이어졌고 다녀온 여행이야기를 하니 시간이 후딱 지나있었다. 막상 글을 쓰려고 갔는데 소설은 안 써지더라며, 결국 '내'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됐고 그래서 작가들은 인터뷰를 통해 글감을 마련한다고 말했다. 비평과 시나리오기법수업을 물었더니 극작을 마지막 부분을 변경하거나 창조하는 걸로 시험을 봤다고 했다. 행간의 빈 공간이 생길 때 질문을 해줘 편했고 배려하는 자세를 지닌 사람이다.
퇴근하고 소설을 오래 봤다. 여자가 약혼 상태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만 약혼자에게 사실을 말했더니, 그녀의 돈에 눈먼 그는 '진실을 말해줘서 더 믿음이 간다'며 결혼을 추진한다. 결국 그녈 돈으로밖에 안 보면서 인격적 대우를 안 해주고, 그녀는 그럴수록 사랑했던 사람과 결혼해야 했다며 후회에 감정에 젖는다. 시간은 어느새 윤을 만날 시간이 되고 있었고 막상 갈 때가 되자 귀찮아졌다. '책 한 권을 더 볼 수 있는 시간인데'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늦을 터였다. 결국 차를 출발했다.
가는 길을 돌아가서 예정시간보다 늦었다. 시간에 늦을 때마다 초조해지곤 말아서, 그래도 몇 분 안 늦었어 위안하려던 찰나, 그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수업 중이니까 그렇겠지' 나 또한 오전 화상교육이 있을 때 그에게 온 연락을 한 시간 뒤에 한걸 기억하곤 이해하려고 했다. 전화했더니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선생님이 마지막 포인트 집어준다고 해서' 결국 늦는다고 했다. 번화가를 걸으면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에 화를 냈을 거지만 이상하게 화의 감정은 없었다. 그 시간의 방황하는 사람을 보면 위안을 얻곤 했다. 다니다가 코인 노래방이 있어 노래를 두곡 부르는데 그가 끝났다고 해서 부러 노래를 끝까지 불렀다. 하지만 나왔더니 그는 또 함흥차사였다. 골목을 두 번 왕복하고 나서야 그를 발견했고 '어서 인형 뽑으러 가자'라고 하는 그의 행동에서 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상대방이 괜찮다고 하면 더 미안해지는 걸 예전에는 왜 몰랐지.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저번과 같은 적중률이 나오진 않았고, 그는 전보다 작은 인형을 건네주며 '미안함'의 감정이 실력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오면서 팔짱을 꼈다. 자연스럽게 손을 그러쥐는 그의 손은 어느새 미끄러져 들어와서 거절하기에도 애매했다. 그의 손은 적당히 크고 보송했다. 예전에 환은 내가 손을 그러쥐었을 때 아무런 힘도 주지 않았는데 윤은 잡은 손에 적당한 악력을 쥐었다. 그가 몸을 가까이하고 나는 정자세로 서있는 이상한 모양, 남녀가 바뀐 상황이지만 싫진 않았다. 항상 혼자 걷던 거리에서 행인을 바라보는 것과, 누군가 함께 걸으며 행인을 바라보는 행위는 다른 차원이었다. 누군가 옆에 있단 사실만으로 주변인에서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올 때만 해도 '똑같은 레퍼토리는 싫은데'하며 어기적어기적 왔지만, 그는 코노를 가자고 했다. 아까 다녀왔지만 모른 체하고 좀 당황스럽단 제스처를 취했더니 그는 그럼에도 성큼성큼 걸어갔다. 1시간을 하자는 걸 30분으로 줄이고 3곡씩 나눠 부르자 그리 길지도 않고 적지도 않는 시간이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모르는 노래였지만 가사가 슬펐다. '뭐야 나한테 하는 말이야?'속으로 생각했지만 아무리 계획충이라 해도 부르는 노래까지 미리 생각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설마 고백하는 건 아니겠지' 김칫국을 마셨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 좋아해야 할지 않아야 할지 모르겠었다.
뒤이어 간 드라이브에서는 뚜껑을 열고 손을 위로 올렸다. 차가 속도를 높일수록 손가락에 와닿는 바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속도를 내면서는 달리고 있는 나와 공간, 그 2개 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음은 해방감을 느끼게 됐다. 윤을 만날 때는 만나기 전까지는 그다지 기대도 되지 않았지만 만나고 나면 충만해지곤 했다. 긍정적이고 타인에게 잘하는 그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아까 코노에서 내가 부른 노래가 블루투스 리스트에 저장돼 있었다. 그는 나를 실망하게 하고, 감탄하게 했다. 어느새 그에게 기대하게 됐다는 걸 느낄 때마다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는 날 발견한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신상들, 몇 번이 곤 말해줄 때마다 되묻는 그를 보며 빈정대야겠단 생각이 들다가도 '기억 안 하면 어때'라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지워질 것들이다. 누굴 사랑했단 기억도, 사소한 습관들도, 절대 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순간도.
'난 김건모가 좋아'
'근데 왜 비난받더라?'
'룸 가서'
'가혹한 거지'
사람들은 남의 흠결을 발견했을 때, 더군다나 그가 유명인일 땐 어떻게든 잡아서 끌어내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거기 가서 말했을 외로움들이 먼저 생각났다. 누군가 정말 의지할 사람이 있다면 굳이 그런델 가지 않아도 위안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거길 찾았다면 상대방을 돈으로만 보는 사람들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을 인간이 그려진다. 나 또한 윤이나 경이 없었다면 꾸역꾸역 그곳을 찾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