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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아 Jun 16. 2024

공허한 포옹



-뭐 해?

-집이지

그는 얼마 전 대화에서 늦게 사춘기가 왔다고 했고, 그런 그에게 공감하기도 했고 그래서 그가 필요하면 가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간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뒤이어 일본어 수업이 있다고 했고, 그래서 1시간이 미뤄졌다. 얜 항상 그랬다. 자기 위주고 일방적이었다. 하지만 안 가겠다고 하는 건 좀스러워 보여 결국 가기로 했다. 붕 뜬 시간 동안 집청소를 하고 대전으로 갔다.


주차는 본인 오피스텔에 하면 된다고 해서 방문등록하고 걜 만났다. 역시 병원옷을 입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며 결국 집에 다시 갔더니 난장판이었다. 그전에는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더니 치울 새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집엔 극세사로 만들어진 인형이 있었는데, 옷을 갈아입고 나서 뽑기를 해준다고 했다. 난데없이 왠 뽑기인가 했더니, 번화가인 그의 집 옆에는 사격이 있었다. 그는 작은 거짓말들을 잘했다. 가령 고깃집에 가서 나를 멀리서 왔다고 말하면서 서비스를 얻곤 하는 것이나 횟수가 정해진 탄발을 몰래 주머니에 넣고 나서 추가사격으로 상품의 크기를 늘리는 등이었다. 거짓말처럼 큰 오리를 선물해 주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곤 까레라를 타고 카페에 갔다. 차선변경하며 도착한 맥도널드에선 그는 나를 응시하거나, 유심히 살펴봤다. 나는 그런 게 부담스러워 계속 커피를 마셨다. 그는 나의 손가락을 만지며 네일을 묻거나, 팔에 있는 빨간 점을 빼야겠다고 말하며 직업병이라 했다. 그런 외모에 대한 발언을 듣는 게 불편했지만, 항상 그런 식이었다. 외로움을 토로했더니 어플에서 만난 다른 여자의 이야기를 하며 나와 비슷하다고 하는 것과, 요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었더니 커리어에 대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과, 마마보이라든가, 설거지가 싫다고 했더니 전여자 친구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가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걔가 했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하자고 하는 것과, 아는 형이 돌싱이라 여자를 꼬신 이야기를 한다던가, 학회 이야기를 하며 나도 관심이 있다고 말했더니 비의료인은 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과, 그의 모든 것들에서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트레이를 내가 들었을 때 거들지 않는 걸 보며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그런 걸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간 이유는 나도 누군가가 필요할 때가 있고, 그걸 누군가에게 묻는 '뭐 해'라는 질문으로 돌려서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걜 만나서 상대방의 마음을 듣기 위해 내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나이가 들수록 조심스러워지고 사람을 새롭게 만나려고 하다가 종교에 전도당할 뻔했다는 것과 타지에 유배 오면서 내 주위엔 공적인 관계밖에 없고 사적인 관계는 없다고 말하며 걔한테 어떤 걸 바란 건 아니었다. 그냥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런 이야기들은 '누군가'에게 말하기보다 식물이나 개한테 말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넌 누군가가 너를 온전히 이해한다고 느낀 적이 있어?"라고 물으니 걔도 생각해 보더니 없다고 했다.



나는 말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까 너와 나의 관계도 잠깐인걸 알고, 그래서 언제까지 갈지 궁금해진다"는 말을 하면서 결국 혼자임을 직감했다. 나는 사실 걔를 위한다고 만나면서 '나'를 위해 그 자리에 가게 된 것이었다. 혼자인 금요일은 너무 익숙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같이 있는 걸 바랐던 것이었다. 번화가를 천천히 지나며 클럽 앞의 여자들을 보며 '쟤는 참 다리가 기네'라고 품평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있었지만 결국 거부감이 들었다는 걸 부인할 순 없다. 나 또한 번화가의 잘생긴 남자들을 보며 눈이 돌아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젊음의 열기가 뒤섞여있는 그곳은 노골적이고 그래서 파괴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아까 오피스텔에 같이 들어가던 나와 남사친을 보던 존잘의 눈에서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되짚어보았다.




몇 번을 도쿄에 갔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오사카를 가본 적이 있냐며 물었고 다시금 '얜 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구나'라는 걸 다시금 확인했다. 하지만 나 또한 걔가 친구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너 결혼하면 축의금 많이 할게'라고 그가 말하자 나도 똑같이 말했다. 내가 어두운 감정을 보이자 그는 달리기를 하라고 했다. '달리기 싫어'라고 말하며, 밝은 성격이 좋아서 다른 여자에게 직진했다는 그가 날 어떻게 볼지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밝은 모습을 연기하면서 사랑받기 원하는 모습으로 보이고 싶진 않았다. 뜨거운 커피를 마셔서일까. 그와 있는 순간은 자극적이거나 불편했고 더웠다. 결국 어머니에게 전화가 오는 그를 앞에 두고 일어나자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전화는 핑계였다.


일본에서 사 온 기념품을 건네주면서, 그걸로 나를 기억하게 하려는 나의 알량한 마음이 잠깐 싫어졌다. 어느 때처럼 쓸쓸히 뒤돌아가려는 순간 그가 날 안쓰럽게 보며 두 팔을 벌렸다. 그건 내가 누군가를 간절하게 원할 때 누군가가 내게 해주길 바랐던 그것이었다. 안김은 '정말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허락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무력하게 그에게 안길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를 부서지도록 안았다. 잠깐 그를 감은 손의 힘을 풀었지만 그가 놓아주지 않았고 나는 다시 그의 등을 안았다. 그의 심장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나의 심장소리만 들렸다. 그와의 관계를 확인하고 싶었다면 무슨 관곈지 물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묻지 않고 그 또한 그랬다. 그는 나를 놓아주며 여자를 얼마 만에 안아보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가끔은 누군가가 숨 못 쉬게 안아주는 걸 간절하게 바랄 때가 있었다. 그럼 압박되는 상황에서의 안정감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안겨있는 순간에는 안겨있단 사실만으로 순간에 몰입하게 됐다. 사랑하지 않는 관계에서의 스킨십은 그만큼 위험하단 걸 알았다. 그건 착각하게 하고 지나고 나서도 곱씹어보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안을 누군가가 없는 나는 체온을 나눌 상대가 없다는 것만으로, 구렁텅이에 빠지는 순간마다 '그럴 때 포옹만 할 누군가가 있으면 좋을 텐데'라고 때때로 생각했다.


조수석엔 오리가 던져져 있었다. 천천히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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