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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아 Aug 25. 2024

내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어느 날은 절망에 빠졌다가 또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거 같고

짧게 떠난 여행에서는 저녁 2차 모임을 가지 않았다. 땀에 절은 옷이 불편했고 편한 옷을 갈아입고 난 모습으로 사람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밖에선 음악소리와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다. 씻고 나오니 부재중 전화와 음료를 다 마신 거냐는 스태프의 문자가 와 있었다. 그렇다고 말하고 침대에 누웠다. 밤의 파도는 날 집어삼킬 듯이 무서웠고 어두운 바다에는 한 사람이 목까지 잠겨 있었다. 해변은 이상하리만큼 사람이 없었고 뒤를 돌아보니 파란 옷을 입은 여자가 경보하고 있었다. 계단으로 이어진 단차 위에서 몇몇은 캠프를 치고 있었고 고기 냄새가 났다. 해변에서 완벽히 혼자였을 때 '여기서 실종되면 아무도 모르게 묻힐 수 있겠군' 생각하려는 찰나 아까의 파란 옷을 입은 여자가 다시 나를 앞질러 갔고 낯선 타인에게 안도했다.


시골의 밤은 도시와 너무나 달랐다. 펜션에는 하나도 불이 켜져 있지 않거나 한 방만 불이 켜있었다. 을씨년스럽게 카페와 편의점 등이 덜렁 있을 뿐이었다. 여름의 열기가 팔에 끈덕지게 달라붙을 때쯤에 차에 타니 에어컨의 냉기가 남아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1km가 안 되는 거리였지만 길이 너무 어두워 진입을 잘못하곤 했다. 더듬더듬 되돌아가니 불빛의 온기가 감쌌다.


사람들은 취해 있었고 저마다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밤의 스탭은 낮과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미소에 관대하고 술에도 관대했다. 엉거주춤 앉은자리에는 누군가의 핸드폰과 담배가 놓여 있었다. 곧 누군가가 들어와 옆자리에 앉으며 소지품을 가져갔다. 아무개는 내게 나이를 물었고 사회생활처럼 그게 불쾌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어차피 한번 보고 말 사람들이었다. 나이를 속일 수도 있었지만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했다. Band라고 써진 벽면의 영문은 언젠가 삽교호에 갔을 때의 낡은 놀이기구를 연상하게 했다. 하지만 그건 보잘것없어서 안정되게 했다. 사람들은 사양하면서도 한곡씩 불렀고 최선을 다했다. 재참여자로 보이는 학생이 추임새를 넣어주었고 그게 웃기고도 좋아서 내가 처한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나와 너무나 다른 사람을 보면 신기하고 관찰하게 됐다. 낯선 이에게 말 한마디 거는 것도 시뮬레이션해야 하는 나는 아무런 때에 멘트를 치고 훅 들어오는 대화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결코 싫진 않았다. 그게 싫게 느껴졌다면 사회에서의 붙임성 좋은 사람들이 어떻게 돌변하는지 알기 때문이라서 일 것이다.


옆자리의 사람이 핸드폰을 되가져갈 때 그의 화면에는 밀리의 서재가 깔려 있었다. 그걸 물꼬로 대화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어느새 나는 방어적이지 않아야 할 때도 방어적이 되어 있었다. 대답보다는 애매한 웃음, 대화보다는 침묵을 택하며 상대방 또한 신상을 물어봐오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처럼 느껴졌다. 어느새 나이에 대한 자각이 생긴 것도 같았다. 나이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들 중 가장 의식하고 있던 것이었다. 혹시나 내 대화가 이성 목적처럼 느껴지면 어쩌나 하는 자기 검열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장은 2차는 한 시간 뒤에 이어진다고 말하며 참여자들끼리 대화를 유도하는 듯이 보였고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누군가의 직장 내 지위가 과장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 나 또한 그런 것들을 노출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그런 거 말하지 않고 대화하고 싶었던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사회적 위치를 빼고 막상 말하라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느끼는 감정들, 혹은 그런 비슷한 걸 말하려면 필연적으로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나올 것이다. 그럼 또 그런 걸로 어느 순간 평가하고 가늠할 내가 보기 싫었던 것도 같다. 어쩌면 피곤하기 싫었던 나의 방어기제였지만 그걸 결국은 깨지 못했다.


혼자인 방에서 그걸 애써 잘한 선택이라며 유튜브를 보면서 '그래 이게 편하지'하고 자위했다. 밖의 소리가 소음으로 들릴 때쯤 스탭에게 '소리가 시끄러운데 귀마개 있나요'라고 했더니 정리했다고 했다. 아침에는 해가 창문으로 길게 들어오고 있었고 이제 또 퇴실하면 체크아웃을 말해야 할 것인지 소리 없이 빠져나올지를 고민하다 보니 퇴실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나올 때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장은 막 어떤 일을 끝마치고 난 후처럼 머리를 쓸어 올리고 있었고 '잘 쉬고 갑니다'라는 말에 그는 커피를 내려주겠다고 했다.


어제의 인원은 거의 퇴실했다고 했고 다 초면이라고 했다. 두 번째 방문이 아닌데도 그와 같은 텐션일 수 있는 건 선천적인 거겠거니 생각했다. 사장의 말은 타인에 대한 친절을 내포하고 있었고 동안이라는 말이 빈말인걸 알면서도 기분이 썩 괜찮았다. '원래 노래를 한곡씩 불러야 하나요'라고 물었더니 그는 자기표현이란 말을 했다. 삶에서 많은 부분 자기를 죽이면서 사니까, 하지만 그런 표현은 필수적이다. 회사에선 자기 색이 강할수록 별종으로 취급받는다. 그건 내가 회사에서 느낀 무력감과 맞닿아 있었다. 내가 그런 '무력감'에 절망하자 상사는 내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설득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설득은 상대방이 어떤 주제에 대해 견해가 없고 상대방에 대한 거부감이 없을 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지, 자신만의 견해가 있으면 (그들은) 결코 타인에게 설득당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십 년간 배웠다.


참여자는 대부분 연박을 하거나 재방문을 한다는 말에 '나도 그럴 것인가' 생각하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에어컨을 가동하고 다음 행선지를 고르고 출발하자 막 옆의 차가 시동이 켜졌다. 그는 체크아웃할 때 마주쳤던 '누나 왜 어제 안 나오셨어요'라고 정답게 말하던 애의 옆에 있던 조용한 애 같았고, 그는 내게 '저는 도로공사 다니는데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었다. '행정 해요' 사회적 미소를 띠고 말하니 '아 구체적으로요'라고 그는 말했고 '데이터요'라고 말하자 '아 저도 비슷한데'라고 말했다. 그는 곧 담배를 피우러 나갔고 그걸로 그와 나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이가 되었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에 깊은 허무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젠 그게 다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연이 아니었겠거니 지워버리게 되었고 이어질 것이었다면 기어이 만나게 된단 걸 알게 되었다. 그건 마치 기적 같고 의지가 있어야 되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향한 열망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한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형 카페에 가니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 저마다 강아지를 한 마리씩 가지고 있었다. 조그만 강아지가 날 침입자로 인식하고 계속 짖었다. 채 30분도 되지 않아 장소를 빠져나왔다. 날은 화창했고 운전할 때는 도착할 때까지의 2시간은 안도할 수 있음을 알아 다행처럼 느껴졌다. 끊임없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예전보다는 벗어났지만 아직 아주 원활하지는 않다.


신호대기 중에 시선을 돌린 곳에는 식당이 해변을 끼고 모여 있었다. 어차피 식사는 해야 하니까 들어선 식당은 혼자온 나를 의아하게 여기며 몇 명이냐 물었다. 한 명이라 하니 '간장게장밖에 안 되는데'라고 말을 줄였고 간장게장은 신선하지 않다는 느낌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괜찮아요'라고 답했다. 찬은 10개나 나왔고 바지락국이 시원해서 몇 번을 들이켜고 비로소 주변을 보니 모두 가족 단위였다. 하지만 옆테이블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앞테이블은 여자와 자식단위 곱하기 2, 아마 자매 거나 그런 것 같았다. 뒤테이블은 생일이었고 조카가 쓴 '감사합니다'라는 편지에 '눈물이 나려고 하네'라는 누군가의 화답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혼자였고 혼자 꼿꼿이 자세를 하고 묵묵히 간장게장을 먹었다. 직원은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디저트를 가져다주며 '다음에는 둘이 같이 와요. 혼자 오면 쓸쓸하잖아'라고 말했고 막상 혼밥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나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고 있는 건가'라는 자각이 갑자기 들었다. 직원은 나갈 때까지 '내가 바리스타예요'라며 친히 커피를 내려줄 만큼 친절했지만 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건 내가 혼자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애써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그런 게 괜찮지 않을 때가 왔다. 운전을 하다가 '내게 적극적이지 않던 윤에게라도 연락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다시 생각해 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감상 때문에 눈에서는 물방울이 나왔다. 자꾸만 차를 추월하려 해도 추월차선은 겹겹이 차로 막혀 있었고 다음 일정을 굳이 도서관에 빌린 책을 반납하러 가는 걸로 정했다.


도착하고 싶지 않은 길이었지만 어느새 도착해 버렸고 책을 반납하자 무언가 다음 일정이 없는 막막함에 휩싸였다. 굳이 읽고 싶지 않던 책이었지만 핸드폰 캡처를 보면 어느 날 찍어놨던 읽고 싶었던 책 목록이 있을 것이었다. 어느 날은 그런 걸 찾아도 이미 예약도서 거나 없는 경우가 있었고, 오늘은 마침 하루에 빌릴 수 있는 5권이 모두 있는 러키 한 날이었다. 막상 서가에서 빼고 나니 6권이었고, '1권은 읽고 가야겠다'라고 읽은 책은 휴대폰을 들락날락하지 않고도 단숨에 읽을 만큼 괜찮았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작가는 그가 겪는 일상의 것들이 나와 다르지 않은 불안을 품고 있어서 안도했다. 그들도 삶을 견뎌내고 있고, 글을 씀으로써 자기를 잊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결정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읽고 쓰는 게 작가의 일이라면 나도 기어이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할 즈음에는 주말에 예약했던 의대편입설명회가 끝날 시간이었다.


어릴 적부터 느껴왔던 결핍이란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지 못했다는 열등감, 서울이 아닌 위성도시에서 태어났다는 부끄러움, 태어난 성별이 남자가 아니어서 유년부터 느꼈던 갈망 같은 것은 나를 가둬두는 틀이었다. 여성이어도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고 새벽 5시까지 공부를 했고 인천에서 사귄 친구들은 대학에 가자 연락을 끊었다. 그게 나의 생존방식이었다. 富에 대한 집착은 표독스럽기까지 해서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도중에도 그보다 더 나은 급의 사람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런 것들은 내가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려는 열정을 가지게끔 했지만 나를 심각하게 망가뜨리기도 했다. 나는 내가 아니려고 내가 가진 민감함과 섬세함을 애써 죽이려고 했다. 그건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나를 끼워 맞추려면 내 개성이 죽었고 그럼 '나'는 뭐야?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내 20대를 규정했다. 내 서른 전은 그런 사회와 나의 끝없는 투쟁이었고 그런 걸 미리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열패감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건 이미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지금의 나를 인정하게 됐다고 생각하며 책을 덮는 순간 다음 읽은 책은 아우슈비츠에서 고문당한 이야기를 적은 것이었고 그 또한 그런 현실에서 태어나지 않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그는 절망적인 순간에서 지식인이 느끼는 것을 말하며, 현실에 순응하는 소시민은 그냥 현실에 녹는다며 그게 지식인과 일반인의 다른 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지식인인가 일반인인가 생각하게 될 즈음엔 그가 신체에 당한 린치가 너무 적나라하여 역하게 느껴졌고 그렇다면 나는 내가 겪은 걸 얼마나 직접적으로 쓸 수 있을까 가늠했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게 된 건 초3 때부터였다. 당시 박종욱 선생님은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하고 고은을 좋아하는 선생님이었다. 그는 일기장에 긴 멘트를 써주는 선생님이었고 어릴 적 어머니와 공원에 다녀와서 쓴 꽃을 세밀히 묘사하고 그때의 기분이 어땠는지 쓴 글에 그 상황이 그대로 느껴진다며 '참 잘했어요' 같은 단문이 아니라 나와 같은 밀도로 장문을 적어주었다. 그때의 인정받았다는 느낌과 글이 사람을 움직일 수 있구나라는 자각은 꾸준히 글쓰기로 나를 이끌었다. 그건 나를 규정하기도 했던 건, 어김없이 '긴 글'을 쓰는 사람에게 나는 잘 빠졌다. 하다못해 나를 거절한 사람이 그 사유를 메신저에 담을 수 없다고 느껴지는 용량으로 길게 써서 보내오면, 굳이 그런 글을 써서라도 날 납득시키고 본인의 거절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게 기껍게 느껴졌다. 하다못해 장문의 글을 써왔던 윤에게도 '네가 싫어서가 아니고 잘 모르겠었어. 우린 친구가 될 수도 있잖아'라고 관계를 이어온 것도, 최근엔 '싫단 사람을 되돌린 게' 부질없다고 느껴지고 그때 그랬던 게 잘한 일인가 잘 모르겠단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너 이청아 닮았어' 그에게 온 연락도 어영부영 끊어버리고 나서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이어지지 않을 테고, 그렇게 정리될 수도 있잖아 합리화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가 되면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체념하게 될 것임도, 억지로 인연을 붙잡고 있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이었는지 나중에 가서 깨닫겠지.


역시나 집에 오니 숏폼만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밖에선 '집에 오면 글을 써야지'라고 생각했으면서. 숏폼에 절인 뇌가 글을 쓰니 충만해진다. 불안에 잡고 있던 핸드폰도 안 보게 됐다. 나에게 솔직해지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럴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유에 다다를 수 있단 것도 알게 됐다. 남들의 요구에 응하는 건 더 피폐해진다는 걸 알고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쌓아가고 있다. 사회가 원하는 그럴듯한 직업은 허상일 뿐이란 걸 알지만, 한순간에 내가 가진 걸 놓을 순 없어서 한 발짝씩 내딛으면서 끊임없이 현상을 내 시각으로 기록하고 무뎌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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