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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아 Aug 30. 2024

힘은 부정적 상황에 있다




찢어지게 가난한 건 아니었지만 항상 절약하며 살았다. 자취를 하고 달라진 점은 습관적으로 뽑아놓던 콘센트를 이젠 그냥 놔둔단 것이다. 내겐 꼽았다 뺐다 하는 번거로움보다 바로 켤 수 있는 편안함이 선호되기 때문이다. 대기전력을 아끼겠다고 콘센트를 뽑아놓는 것과, 가성비를 중시해서 항상 농산물 시장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채소를 사서 하루종일 다듬는 건 비효율적으로 느껴졌다.


에어컨이 없었던 건 이제 입이 아프고, 기억에 남는 건 학교 체육복이다. 교복은 고가인 아이비를 사지 못하고 저가교복을 입었다. 체육복은 남이 입던걸 물려 입었다.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주었겠지만 아쉬운 소리 하며 손 벌리기가 싫었다. 그래서 어릴 적 내 목표는 성공해서 돈을 마음대로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학생신분이 싫었고 빨리 성인이 되고 싶었다.


성인이 되고 남들은 학점관리를 했지만 나는 각종 알바로 하루를 채워 살았다. 방학이면 남들은 계절학기를 들었지만 돈을 내고 추가로 수업을 듣는 건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는 안과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가게에서 일하느라 한 번은 서빙을 하는데 손님이 '어디서 본 거 같은데..'라고 했다. 나는 그 손님을 안과에서 봤던걸 기억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동기들은 군대를 갔다 오고 거의 전문직을 준비했다. 가장 많이 하는 게 CPA였고 다음으론 CTA나 관세사, 간혹 감평사를 준비하는 친구도 있었다. 미래를 생각하면 그래야 했지만, 돈에 대한 강박이 너무 커서 어쩌면 빨리 회사원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일단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주어지니까. 집에서 받는 용돈은 한 달에 40만 원이었고, 그걸로 교통비와 식비를 하면 모라자서 돈을 벌어야 했다. 막 동생까지 대학에 들어가서 외벌이인 아버지는 짜증을 냈고 나는 집에서 숨죽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PA 한다고 했을 때 지원해 주겠다고 해서 학원을 다녔지만 고등학생 때의 처절했던 기억이 공부라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결국 취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막다른 길은 정규직이 되게 했지만, 사내정치나 보편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각각의 인간은 인간을 회피하게 하고 혼자 하는 일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게 됐다. 여자 혼자 잘 사는 유튜버들 보면 부럽다가도 계속 싫다 싫다 하면서 회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실망스럽기도 하다. 불만족한 회사, 혹은 주변에 없는 친밀한 관계가 지금의 현실이지만 그래도 매일 노력하고 있다. 나로 우뚝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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