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칠 것인가, 시비를 가릴 것인가

by 강아

10월에는 연휴가 많이 껴있다. 그렇게 쉬게 된 날에는 한 발짝도 밖에 나가기 싫어서 집에 콩 박혀 있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했지만 냉장고에 어머니가 바리바리 싸다준 음식이 많아도 신선한 걸 먹고 싶었다. 그래서 배민을 시킬까 고민하다가 인근 마트에 전화를 했다. 나는 지역사회 슈퍼를 이용해야 한다는 주의자는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특상품은 대형마트로 먼저 갔고 슈퍼에는 대형마트에 가고 남은 것들이 왔다. 이건 수년간 장을 보면서 느낀 서사이다. 공산품은 차이가 없을지라도 신선식품의 차이가 났다. 예전에도 슈퍼에서 물건을 샀다가 과일이 썩어 있어 반품한 적이 있었다. 가서 싫은 소리 해야 하는 귀찮음 반, 썩은 과일을 보는 불쾌감 반이었다.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도 귀찮다는 이유로 슈퍼에 또 배달을 시키고 만 것이다. 대형마트에 배달을 시키면 다음날이 되기 때문에 빨리 배달을 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전화하니 직원은 30분 뒤에 출발한다고 했다. '좋은 세상이군 전화하면 물건을 배달해 주다니' 지역슈퍼는 3만 원 이상시키면 무료배송을 해 주었다. 직접 상품을 보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조금 있었지만 별 문제없겠거니 하고 기다리니 1시간 내로 배달이 왔다. 소파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켜 문 앞까지 배달된 박스를 안으로 들이는 것도 힘이 들었다. 가공식품은 사지 않고 샤인머스캣 한 박스와 삼겹살 한팩, 요구르트를 샀다.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몇 개 사지 않았는데 4만 원이었다.


최근 샤인머스캣이 풍작이라 지역카페를 이용하면 더 싼 가격에 구매할 수도 있단 걸 알았지만, 가지러 가야 하는 수고가 있기 때문에 신선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확실성에도 슈퍼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먹고 싶은 마음에 봉지를 열어 포도 반송 이를 잘라 꼭지를 떼니 헐겁게 송이가 떨어졌다. 신선한 포도는 톡 소리가 나며 경쾌하게 뜯어져야 하는데 힘없이 떨어졌고 떨어진 부근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간혹 한 개씩은 완전히 물러 갈변되어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이 송이만 그랬겠지 씻어서 채반에 거르니 포도가 단단하지 않고 흐물흐물했다. 팽팽함을 지닌 것이 아닌 만득이 같은 질감이기도 했다. 미련하게 그걸 먹다가 한 개가 상한 맛이 났고 기분이 잡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불하러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집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남은 시간 동안 나는 상한 포도를 꾸역꾸역 먹었다. 포도 세 송이는 집밖으로 나가지 않는 하루동안 아무 생각 없이 먹으면 다 먹을 양 같기도 했다. 그렇게 힘이 없는 포도를 먹을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또 계속 먹었다. 하지만 먹다 보니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골라 먹어도 마지막엔 무른 포도가 남잖아. 내가 왜 내 돈 주고 상품성 없는 포도를 먹어야 돼?' 하지만 '이제 다 먹어 가는 걸, 얼마 남지 않은 포도를 가지고 가 환불하는 것도 진상 아닐까?'라는 마음의 소리가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송이를 먹어갈 때쯤 채반에는 먹지 못한 상한 포도알이 쌓여 있었고 다음날이 되고 회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왜 상한 포도를 참고 먹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퇴근하고 슈퍼로 갔다.


'아니 배달을 시켰다고 일부러 상한 걸 보내주신 건가요?'라고 묻자 직원은 '그런 건 아니에요. 담당자 불러드릴게요'하더니 전화로 급히 누군갈 찾았다. 내가 불평하느라 다른 사람들이 계산을 기다리고 있자 물러서서 과일코너에서 과일을 보며 '이건 신선해 보이는데 왜 나한텐 이런 걸 갖다 준 거지'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관리자가 왔다. 결국 그 사람 입장에선 나는 먹다 남긴 과일을 들고 와 환불을 요구하는 진상고객이었고, 그래서 언성을 높이지 않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았고 '교환해 드릴까요 환불해 드려요?'라고 했고 '환불요'라고 하자 '결제한 카드 주세요'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그가 진심으로 사과했다면 오히려 내가 미안할 수도 있었다.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난 항상 상대방이 고압적으로 나오면 맞서 싸웠고 저자세로 나오면 내가 더 낮췄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해서 나도 싸늘하게 '계좌이체 했는데요'라고 말했다. 그는 군말 없이 현금 16800원을 포스기에서 꺼내 줬다. 팔백 원은 동전인데 어디에 쓰라고 황당했지만 조용히 그 돈을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남들은 그냥 똥 밟았다며 쓰레기통에 버릴 포도인데, 만육천팔백 원을 가지고 굳이 구매처에 가서 싫은 소리 하며 환불하는 나도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싫은 점이 있으면 얘기하지 않고 조용히 멀어지는 것보다, 나는 개선점을 분명히 말하고 다음에 또 그 슈퍼를 가는 스타일이다. 사회생활에서도 나는 잘잘못을 따지고 분명히 하고 넘어가는 태도여서 지금껏 수모가 많았다. 하지만 스타일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