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기다린 모임이었다. 모임장에게 화목을 제하고 열어달라고 요청한 후 열리는 금요일 모임이었다. 이날은 병가여서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한 다음 점심을 가보고 싶던 분식집을 가려고 시간까지 계산했다. 병원예약은 12시였고 가게 오픈 시간은 11시 반이었으나, 27분에 문 열고 들어가니 오픈 전이라고 거부당했다. 마음이 상해 메가커피에서 아메리카노를 픽업한 다음 근처의 쌀국수가게에 갔다.
그날은 정말 추웠다. 밍크를 뚫고 바람이 들어왔고 가게의 훈기로 몸이 녹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혼자였지만 여느 때처럼 씩씩하게 양지를 하나 주문하니 음료수를 서비스로 준다고 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힘 있는 목소리로 고객을 반기는 그의 목소리는 최근 자영업의 어려움을 최선을 다해 이겨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옆자리의 여자 두 명은 직장 동료인 듯, 자녀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이가 연년생으로 생겨버렸잖아
-얼마나 귀여운데, 혼내면 눈치 보는 게.
하며 끊임없이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고, 나는 어느새 그들과는 다른 삶의 경로를 걷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온몸으로 행복함을 표시하는 그들이지만, 그녀들의 삶이 있고 나의 삶이 있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땐 점심할인이라며 3%를 깎아주었다.
치료를 위해 간 병원에서는 꼼꼼히 처치해 주었고, 아플 거라 지레짐작한 것에 비해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하고 치과를 빠져나왔다. 그곳은 스케일링을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던 전애인을 데리고 간 곳이었다. 그는 이제 세종에 없지만, 나는 세종에 남아있다. 그가 서울로 직장을 옮기고 나서 어느 날 치료를 위해 그 병원에 들렀다가 내 퇴근길에 맞추어 회사 앞에 서있었을 때 나는 환각을 보는 것 같았다.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평온한 일요일이었다. 평소처럼 카페를 가기로 했고 대형카페의 2층에서 커피와 디저트를 앞두고 그는 말했다.
-우리 시간을 좀 갖자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 말이야?
그는 작정하고 나온 사람처럼 자기 의지를 관철했고,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주말에 그의 말을 갑자기 들어버리고 만 나는 그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헤어짐이라는 걸 명백하게 알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를 위해 썼던 시간들은 헤어지고 난 다음부턴 무효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외면하다 그가 2주의 유예 끝에 집에 와서 다시금 헤어짐을 말했을 때 발악할 수밖에 없었다.
오열과 원망이 가득한 가시 돋친 말이었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후회할 거야 같은 상투적인 말들. 하지만 끝의 순간에 나오는 말들은 그런 말뿐이었다. 그때야 거짓말처럼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실감했다. 끝까지 그의 안녕을 빌어주기보단 내가 그를 만나서 썼던 돈이나 시간 등이 먼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는 듯 현관을 열고 나갔다. 방금 전까지 이년을 함께했던 사람이 문 밖으로 나가면서 그와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닌 것이 되었고 나는 버려진 것처럼 눈물을 그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는지 그치고 나서는 이렇게 슬픈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감정과 몸이 따로라는 건 한동안 날 짓누르다가 또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니 참을 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떠난 후 그는 6개월 뒤에 치과를 들르다가 왔다며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소했던 그였지만 더 왜소해진 모습으로 항상 걸치고 있던 초라한 회색 후드니트집업을 걸치고 비적비적 나타났다. 항상 지나던 퇴근길에 그가 있단 것은 그 공간을 왜곡되어 보이게 했다. 분명 그는 거기 있어선 안되는데 익숙한 거리에 그가 나타났을 때의 당황스러움이 반가움보다 더 컸다. 그는 패션이라고는 몰라서 옷 같은 건 항상 입고 다니는 게 정해져 있었고 만나는 동안 그것들을 제발 바꿨으면 했지만 그는 멀쩡한데 왜 버리냐고 하고 문신처럼 입고 다녔었다.
-밥 안 먹었음 먹으러 가자.
그가 말했다. 동네에서 그나마 세련된 외관을 지니고 있던 고깃집에 가서 그를 마주하곤 역시 일상적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를 다시 만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이미 그에 대한 감정마저 다 희미해지고 만 후였다. 마치 그가 내 일상에 없었던 것처럼, 없던 사람처럼 헤어지고 2달이 지나고 나자 나는 잘 지내고 있었다. 그가 그날 왜 왔는진 지금도 모른다. 그렇게 모질게 떠나고선 내가 잘 살고 있나 궁금해서 온 걸 수도 있고, 그렇게 악담을 퍼붓더니 그날 이후로 연락을 한 번도 안 한 독함에 의아하게 느껴졌던 것도 같았다.
그를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 방법은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매달리면 그는 그의 선택에 더 확신을 가지고 날 떼어내기 위해 노력할 것을 알았다. 그런 시간들이 지나고 마침내 재회했을 땐 다시금 그와 헤어질 때의 감정이 살아나서 슬펐지만, 결단코 그와의 관계를 다시 재생하고 싶어서 흘린 것이 아니었다. '시간은 지나갔고 그건 되돌릴 수 없다.' 그건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만날 때 차가 없던 나는 조치원에서 서대전으로 간 다음 그는 서대문역 쪽 길에 차를 세우고 나를 기다렸었다. 그를 만날 때 했던 습관 같은 것들이 헤어지고 난 다음 그런 게 있었는지조차 의심처럼 느껴졌다. 그와 헤어질 때쯤엔 차를 사겠다고 대전 중고차단지에 가서 중형차를 봤었다. 아마 무의식적으로 그와의 헤어짐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혼자 살아갈 삶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차를 계약했고 그와는 이별했다. 그가 거짓말처럼 얼굴을 보겠다고 왔을 땐 그는 차를 두고 왔다고 했다. 항상 운전석에 그가 앉았었는데, 이제는 운전석에 내가 앉았고 천천히 그를 데려다 주기 위해 오송역으로 차를 출발했다. 스무스하게 운전하던 나의 차를 타던 그는 -잘하네라고 말하며 이제는 그가 없어도 잘 사는 나를 보며 안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장거리 운전을 할 때마다 피곤하다고 엄살을 피던 것은 그저 엄살뿐이었음을 내가 운전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는 서울에서 100만 원에 달하는 고속터미널 역 근처의 원룸에 살고 있다고 했다. 아픈 동생이 있어 부모님은 항상 동생을 걱정하신다던 그를, 본인은 절대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할 거라는 그를 역에서 내려주면서 그제야 그와 정말 끝임을 알 수 있었다.
-잘 가
그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리다 조수석에서 내렸고 나는 왠지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종결을 알리는 나만의 의식, 돌아오는 길은 사방이 시커맸다.
그날 독서모임에서는 거짓말처럼 '헤어짐을 당했을 때 어떻게 극복했는지' 물어왔다. 이 긴 이야기를 '어느 날 그가 헤어지자고 했고 그 후에 그가 한번 왔었어요. 근처에 볼일이 있다는 말로'라고 말했다. 한때는 너무 아파서 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말할수도 있었지만 난 그저 '시간이 해결해 주더라고요'라는 통속적인 말로 마무리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