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장 보고건이 있어 어제 윗선에 보고하지 못한 라인에 쭉 찾아갔다. 다른 팀과 엮인 사업이지만 시행문서는 항상 내가 결재를 득했었다. 하지만 연관부서도 같이 들어가자고 보스가 말했고 들어갔다. 작년과 뭐가 달라졌는지를 말하자 싱겁게도 보고는 끝났고 사고 친 옆부서의 장은 내게 '수고했어요'라고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영업용 미소를 띤 채 자리로 와서 입찰 내보낼 준비를 했다. 그러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어 팀식사를 했는데, 인턴생일이라고 챙겨주면서 내 생일은 안 챙겼던 부서원들이 괘씸하면서도 어쨌든 식사는 하러 나갔다. 말끝마다 트집 잡기 좋아하는 보스랑 말 섞기가 싫어서 한마디도 안 하고 팔짱 끼고 있었더니 그도 그러려니 하는 듯했다.
지역 내 남녀커플 만들기 행사가 있다고 했고 윗직급은 내게 나가보라고 했다. 미쳤나 거길 나가게. 강경하게 안 나간다고 하고 있으니 보스는 회사에서 나이 많은 여자들 중 결혼 안 한 사람 이름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내가 봤을 때 결혼 안 한 싱글보다 그가 더 불행하게 사는 것 같은데 개인 사정은 알 수 없다고 쳐도, 조직의 개가 된 채 자식의 말이라면 벌벌 떠는 그의 모습은 별로 그런 미래를 원하지 않게 한다. 그 입장에선 결혼 안 한 게 비정상이니 안 한 사람을 싸잡아 어떤 범주로 묶는 것도, 은연중에 대화에서 나오는 '여직원이, 여자가'하는 말들은 '이 사람 꼰대네' 생각하게 하지만 맞서 싸우는 것도 에너지가 든다.
회사에서 부당한 것에 대해서 남들처럼 참지 않고 말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화를 내는 건 감정도 소모되고 기분도 되려 나빠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애써 대꾸하는 건 그렇지 않으면 '상황에 동의하는 것'으로 표면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옆부서 직원이 실수했을 때도 그렇게까지 '똥을 밟았다'며 소리 지르지 않았다면 상황은 '그가 무능한 직원이라서 그럴 수 있다'가 되어버리고 그냥 그럴 수 있는 해프닝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소리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아닌 게 된다'
그런 성별 차별, 오늘처럼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정상이 아닌 범주로 간주될 때 '왜 결혼을 안 하냐'라고 묻는 그에게 '왜 결혼을 했느냐' 묻지 않는다. '결혼이란 무엇인가' 하며 반문하지도 않는다. 결혼을 한 삶이 있고 하지 않은 삶이 있으며 그냥 그게 공존하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지금껏 학생 때 공부하느라, 대학입시를 치르느라, 취업준비를 하느라 사회 구성원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그런 사회화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숨이 막힌다고 생각한다. 남들과 다른 궤도로 살면 이상한 삶이 되어버리는 대한민국에서 나는 타인처럼 똑같은 길을 걷지 않고 '꼭 남자를 만나지 않아도'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면서 살겠다는 것뿐인데, 그게 미완성의 삶으로 정의되어 버리는 그 상황 자체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안 싸웠냐면 그냥 밥 먹을 때 밥만 먹고 싶었다.
사람들은 또 워크숍을 어디로 갈 건지 이야기했지만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피상적인 관계에서 여행을 한번 다녀온다고 그 사이가 좋아질 수가 있는 건가. 하긴 이 사람들 회사 아닌 곳에서 만났으면 이렇게까지 싫어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사전 보고 했는데도 메신저 안 보고 다른 일 하는 임원 때문에 홧김에 조퇴해서 연습실에 4시간 동안 박혀있다 나오는데 엘베에서 문제의 사고 친 옆팀직원을 봤다. 그는 날 보자마자 '여긴 어떻게'라고 물었고 '여기 피아노학원 다녀서요'라고 하자 그는 '저는 당구학원..'이라고 하며 수줍게 웃었다. 우습게도 회사에선 '네가 그러고도 선배냐 일을 좆같이 하네'라며 온갖 쌍욕을 다했던 사람이지만 밖에서 만나자 그런 감정들이 신기하게도 희미해지고 말았다. 화를 내지 않는 방법론 중에 하나가 '저 사람도 결국엔 죽는다'라는 명제였는데, 결국 일로서 엮이지 않고 인간대 인간이면 웃고 지나갈 수도 있는 건데 '일'이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 고뇌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