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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는

by 강아

출근했는데 상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메일로 상위에 보내기 전에 나한테 좀 보여주라고'라며 언성이 올라갔다. 필시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다. 그의 기분에 휘둘리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데시벨이 올라가고 신경질적인 그의 말투에 나도 목소리가 곱지 않게 나갔다.


'수정할 거 있으세요?'라고 묻자 그는 답이 없다.

그냥 메일을 봤는데 참조가 걸려있고 마침 심기가 불편하겠다 시비 거는 것이다.

내용도 읽어보지 않은 채 그의 허락 없이 상위에 자료가 나간 게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할 말은 아닌 게 어차피 그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없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막상 해결책을 마련하라 하면 유관부서에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하러 다니기 바쁜걸 수없이 봤기 때문이다. 그의 의사결정이 크리티컬 한 경우가 없었고, 의사결정을 했다 해도 법조문만 보고 표면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실무적으로 통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지난 1년간 그 사람을 겪자 어떤 사람인지 파악이 됐고, 그래서 보고를 안 하고 cc를 건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대로는 '공유'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짜증이 났다. 뭐에 대해서? 내가 하는 일에 공손하게 그에게 의견을 묻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작년이랑 달라진 게 뭐야' 짜증을 내는 그의 말투에 지지 않고 답했다

'매출액 데이터 보관기간을 5년으로 늘려 각종요구자료에 대응할 계획입니다'

그는 재빨리 사이트에 찾아보더니 '뭔 소리야. 여기 2년이 최장기간이라고 나와있잖아'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 또한 지지 않고 말했다. '돈 주면 가능합니다'

'확인해 봤어?'

'네'

그러자 그는 말싸움에 진 게 분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점은'

'데이터분석 전담인력을 마련하여 업무가 과중되지 않도록 할 예정입니다'

'뭔 소리야. RFP 뽑아가지고 와봐'


라고 하더니 또 다른 직원을 불러 뭐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교육을 왜 상위에 가서 하냐고. 상위를 위한 교육을 왜 우리가 하냐. 이거 다과랑 지들 먹기 위한 거 아니야'라고 하는 것이었다.

담당자는 말했다. '이게 상위가 결정한 것이어서..'

'강사는 왜 그 사람으로 해? 상위가 아는 사람이래?'

라고 하자 '아 작년에 했던 사람인데 반응이 좋아서 이번에도 하는 거고 상위가 결정해서 변경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상위에 본인이 전화해서 따지면 되지 왜 애먼 직원을 괴롭히나. 당사자 앞에선 한마디도 못하면서 강한 척 본인이 까칠하다고 생색내듯이 말하는 것도 웃긴다.

업무를 추진할 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도 상사의 의견을 묻지 않고 일한다. 어차피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의 인맥 추천이거나 실무에 도움이 안 되는 '법령집 읽기',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법을 못읽는게 아니다. 사업을 추진할때 법을 읽어가면서 해왔고, 단지 그가 잘못알고 있는건 법조문의 한 구절로 그것이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판례가 있는데 그는 '구절'만 보고 그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는 그런 상황이 분한 것이었다. 자기 직원인데 나한테 굽신거리며 보고하지 않는 태도, 타직원이 회의에 필요한 다과를 사러 나간다고 말하면 '뭐 다과가 필요해. 얼마 전 영수증으로 감사에 실제보다 많이 썼다고 걸렸잖아'하며 외부지적에는 벌벌 떨면서, 막상 본인이 필요한 맥심 커피를 아무도 안 사놓고 탕비실에 숨겨놓자 커피 사달란 말은 못 하고 '어디에 보관해 놨어?'라며 굳이 날 시켜서 그의 옆자리에 커피를 옮겨놓게 만드는 그다.


한탕의 핀잔이 끝난 후 제안요청서를 출력해서 들고 갔다. 그가 원하는 게 그의 옆에 앉아 잔소리를 듣게끔 하는 거라면, 해줘야지 별수 있나.

'전담분석인력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그거 갑질이야'라고 말하더니 또 말을 바꾼다

'그럼 여기에 써야지 왜 안 써?'

라고 해서 '갑질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안요청서엔 넣지 않고 기술협상에 넣을 예정입니다'

'그걸 왜 기술협상에 써? 여기다 써'

라고 말하는 그 조차도 뭐가 뭔지 헷갈려했다.

'아까 말한 건 어떻게 확인해 봤어?'

'전화로 확인했습니다'

'누구한테?'

'데이터센터 직원한테요'

'누군지 알려줘 봐'


낼모레면 퇴직할 그의 잔소리에 응답해 주기도 지치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중년이라 그런가 남들이 우쭈쭈 해주고 추앙해 주기를 바라나 보다. 타직원은 혹여 승진하고 싶은 마음에 그럴지 몰라도 난 절대 그럴 생각이 없다. 그가 소리 지르면 나도 고분고분하게 있지 않고 한마디도 안 지고 맞받아친다. 내가 그의 감정쓰레기통도 아니고 지 기분 안 좋다고 거기 맞춰주려고 입사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엔 오후엔 일을 하나도 안 했다. 아무리 열심히 유관부서에 내용 확인하고 상위에 던져도 돌아오는 건 비난밖에 없으니 역시나 '열심히 할 필요가 없는 건데' 놓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등 인턴과 노가리를 까고 있었다. 인턴의 옆자리에 서서 훈수를 두고 있는 그의 배가 남산만 하게 곡선을 흐르며 처져 있었다. 결국엔 얼굴을 봐도 욕지기만 나오며 그런 내가 견딜 수 없어 조퇴를 쓰고 나왔다.


회사에서 분노에 차서 퇴근하며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 것도 집에 오면 의지가 사라져 버린다. 또다시 공부를 하고 싶지도 않다. 단지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일 뿐. 퇴사한 친구가 '이제 다시 취업하고 싶어'라고 했던 말도 기억한다. 친구가 말했던 건 회사생활을 하지 않아 그녀 주변의 일상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에 재취업을 원했던 것이다. 퇴사를 하고 다시 취업하고 싶은 마음이 친구처럼 들 수도 있지만 나는 퇴사하지 않지 않았나. 회사가 주는 지독한 열패감을 이젠 반복하고 싶지 않다. 또 그만둔다고 해서 굶어 죽을 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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