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관통하는 무엇

by 강아

금요일이 다가올 주말에 대한 기대감에 기분이 좋은 것처럼 일요일은 다가올 월요일이 있어 기분이 좋지 않다.


특별한 사건도 없었고 누가 찾지도 않는 여느 날과 같은 일요일이었다. 몇 번이 곤 숏폼을 새로고침하다가 머리가 아팠다.


그러다 보니 생각은 자꾸 과거로 회귀했다. 나는 왜 그랬을까? 사회 초년생 때의 어떤 불안함, 목표가 없는 삶은 이대로 다음날에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행복이 긍정적인 상태고 불행이 부정적 상태라면 많은 시간을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으며 살아왔다. 과거에 불행했다면 지금 행복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얼 놓치고 살고 있는 걸까.


행복은 너무 순간적이어서 어느새 반대급부가 디폴트가 되어버린 삶. 그런 걸 보면 행복이란 참 허망하다. 다들 찰나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원하는 게 얻어지면 다른 걸 원한다.


지나고 보면 이십 대의 삶은 그런 허무에서 비롯하는 절망감이 대부분이었다. 삼십 대가 되어 그만큼의 자기혐오는 하지 않게 됐지만 가끔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이젠 피아노를 친다. 이 또한 무용하지만 순간만은 몰입할 수 있으니 어린 시절 어머니가 왜 악기를 권했는지 알 것 같다. 나보다 먼저 산 엄마는 삶의 허망함, 절망, 그에 수반하는 감정을 먼저 겪었을 테니까.


무언갈 목표로 삼아도 잠깐 사색할 시간이 생기면 ‘이게 정말 맞아?‘라는 자기 의심도 생긴다. 그러지 않기 위해 다시 피아노를 둥당거리지만 아직도 확신은 없다. 단지 ‘지금보단 나을 거야’와 ‘100% 확신을 했을 때면 이미 늦었을 거야. 70%의 확신을 가진 지금이 제때인 거야’라고 자신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그거 해봐야 먹고살 수나 있겠어?’라는 의심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음악 석사를 해서 결국 사람들이 한국으로 복귀해서 자기돈을 써가며 예술의 전당에서 독주회를 하는 걸 감당할 수 있겠어?‘까지 생각이 확장되었다. ’그래서 교육학을 선택한 거잖아 ‘날 설득해 봐도 ’그래서? 유럽에서 음악선생님 할 거야?‘라는 물음에도 Question mark가 떠오른다.



지역화폐를 충전하다가 ‘사람들이 21천 원 할인받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상황‘을 마주하면 ’ 내가 현실감각이 없는 건가?‘란 생각도 든다. 과거를 돌아봐도 터널의 한가운데 서있다고 느껴질 때마다 ’ 나아지겠지 ‘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는 것밖에 그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있지 않았다.


최소한의 회사생활에 필요한 것들, 가령 근태-만 꾸역꾸역 하는 근황이다. 내가 Ceo라면 나 같은 직원을 당장 잘라야 하지만 그러기엔 나 외 다른 직원들도 나와 별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매스컴은 청년실업이 심각하다고 떠들지만 어떤 바운더리 안의 삶은 그것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다. 재벌이 중산층의 삶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글을 쓰는 일을 하겠다고, 자본주의에 치를 떨면서 도 결국 돈과 나를 분리시킬 순 없다. 스크롤을 넘기다 본 히키코모리 영상이 ‘회사 안 다니면 내가 그 모습일 텐데’라며 조소했다.


그러다 앞으로의 생계에 대한 불안은 월요일이 다가오는 일요일 저녁에 테마주, 기업분석으로 이어졌다. 객관적으로 봐도 난 청년층의 상위권에 있다. 안정적 직장, 본인 한 몸만 건사하면 되는 간편함, 노후준비를 끝내놓은 부모님, 청년 평균적 자산을 상회하는 현황과 인생에서 크나큰 불행이 없어 초래되는 무료함까지. 하지만 어떤 채워지지 않은 불안감,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걸까?’가 내 주말을 관통하는 무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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