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의 유년시절 기억은 원봉리 시골로부터 시작된다.
지금은 치매를 앓고 있는 이여사는 전북 익산 원봉리에서 가난한 할아버지와 결혼하였다. 할머니는 부유하게 자랐지만 할아버지의 똑똑함과 카리스마에 반한 듯했다. 세척당근이라는 개념이 없던 예전부터 할아버지는 이장생활을 하며 농작물을 씻어서 장에 내다 팔 생각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걸로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며 외삼촌은 말씀하시곤 했다.
할머니 집은 가는 길은 당연히 비포장도로이고 한대 갈 만큼의 길밖에 있지 않다. 그 길을 차로 가다 보면 대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곳이 나타났고 어린 시절에도 그 순간에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만큼 오지이고 마을 입구에 할머니 집에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이웃집이 늘어서 있곤 했다.
할머니 집 앞에는 저수지라고 부르기엔 작은 물웅덩이가 있었는데 설에 가면 그 물이 얼어있어서 비료포대를 타고 썰매같이 놀곤 했다. 정월대보름에 하는 쥐불놀이를 하기도 했다. 태울 것을 가지고 어설프게 하는 태움이었지만 그때의 불의 느낌과 따스함, 방화를 하고 있다는 옅은 죄책감과 그렇지만 어른들이 용인해 줬기 때문에 해도 된다는 안도감에 깡통을 휘휘 돌렸었다.
어렸을 때의 그런 감각적인 기억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 유년시절 중에 인화된 흑백사진처럼 각인되어 있다. 할머니는 몇 마지기의 논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산딸기 밭도 있었다. 좁은 길을 젊었던 할머니 따라 친척들과 가면 거짓말 같게도 산딸기밭이 나타났고 할머니는 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한 통을 다 채우면서 중간에 먹던 산딸기맛은 뭐 그리 달큼했는지 톡톡 터지는 알알이 그 바알 간 빛과 융합되어 기억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아직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때 일이 어제인 것처럼 생생한데 그랬던 할머니가 지금은 요양원에 있다. 다행히 숙모가 운영하시는 곳에 있어 가족들의 걱정이 덜하다지만, 주마다 가족들이 돌아가며 면회를 가도 할머니는 기억의 혼재와 섬망으로 했던 말을 또 하고 어느 날엔 다 기억하는 듯이 총기가 있다가 어떤 날은 그런 거 같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