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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갈 수 없는 그곳

by 강아

할머니는 가난했었지만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식들을 다 장성시켰으리라.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어머니는 삼양라면만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고 했다. 서민의 가장 만만한 먹을거리였던 라면만 있으면 어머니는 밥을 두 그릇 먹었다고 했다.


할머니의 생활은 눈뜨면 밭에 일하러 가서 수확하면 그걸 장에 내다 파는 일이었다. 할머니 집에는 축사가 있어 소와 같은 대동물 한두 마리와 개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개를 키웠고, 엄마 말로는 토끼를 엄청 귀여워했다고 한 걸로 보아 닭과 같은 소동물을 몇 마리 키워서 넉넉하진 않지만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나갔던 것 같다.


그런 원봉리의 집은 집 앞에는 웅덩이 하나와 마당에는 잔디가 촘촘하게 깔려 있었다. 화분에는 선인장이 끝없이 심어져 있을 정도로 잡초 한 포기를 용납하지 못하고 또 마당의 빈자리에는 꽃을 심을 정도로 정원에 대한 애착이 강한 분이셨다. 섬망에 걸리기 전까지도 시간만 나면 풀포기를 뽑는 게 일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원봉리를 떠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억이 오락가락하면서도 할머니는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 나라도 그렇지 않을까, 나는 멀쩡한 거 같은데 자식들이 시설에 보내려고 한다면 죽어도 안 간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할머니 상태가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웃집에 사는 분들도 하나둘씩 떠나 할머니가 요양원에 올 때쯤엔 할머니 하나밖에 남지 않아 외로움이란 문제도 절대적이었다.


그런 할머니의 뇌리 속엔 집이라는 존재가 인처럼 박혀있어 집에 가겠다고 주장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전라북도 익산에서 할머니가 혼자 있는데 무슨 일이 생긴다면, 긴급상황이 있을 수도 있고 이제는 할머니 다리의 근육도 빠져나가 걷는 것도 불편해질 즈음이었다. 복지사 자격을 가지고 있는 숙모가 할머니 정신을 테스트하러 건보에서 나오면, '그때 잘하셔야 된다'라고 할머니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등급이 산정되고 국비를 지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인지 아닌 건지 할머니는 그때 정신이 온전치 않으셨고 등급을 받아 시설에 묵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원봉리는 할머니 기억 속에 여전히 가고 싶은 그리운 곳으로 남아 이제는 갈 수 없는 유토피아로 남았다. 나라도 모셔다 드리고 싶고 그건 삼촌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막상 어른들이 모셔다 드려도 흙만 쥐었다 피었다 다시 와야 하는 게 현실인 것이다. 할머니가 이런 상태인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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