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환경, 다른 사람

2019 회고록 중 발췌

by GOYA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색다름’이다. 여행지는 내가 일상을 보내는 도시와는 다른 색감을 가지고 다른 맛을 낸다. 냄새도 다르며 들려오는 소리도 다르다. 다른 것들 속에 내던져진 자아는 그 조차도 다른 색을 지니게 된다. 항상 우울감에 사로 잡혀있던 사람도 풀내음 물씬 풍기며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과일들 옆에 서면, 없던 호기심도 생기고 활기를 되찾는다.

과연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을까? 환경 자체가 영향을 끼치진 않을 것이다. 시트러스 향이 진동해도 그 농장의 주인은 마냥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풀내음이 나의 코를 간질여도 내게 많은 과제들과 미팅이 있다면 그것들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을 것이다. 풀내음과 과일 속에는 책상이 없다. 내 세상을 가득 채운 책상과 서류와 상사와 업무가 없는 그 세상에서는 하늘과 바람과 풀과 과일이 나를 맞아준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관심사며,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선택지들이다. 이처럼 주위 환경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달라진다.

항상 정확한 숫자만 골몰하던 사람들도 셈법이 느려지고 뭐 하나라도 더 경험할 요량으로 아침에 눈이 떠지는 게 여행이다. 환경의 변화는 기본적으로 가치관의 변화를 불러온다. 보통은 그 가치관이 일상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행하면 맛집, 사진, 누군가는 혹시 모를 영화 같은 로맨스를 꿈꾼다. 다만, 여행이 특별한 이유는 해묵은 것 중에서도 보이지 않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는 알지 못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중요한 것들. 이 작은 관심은 가끔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기도 한다. 마리아 릴케와 우연히 같은 공간에서 오랫동안 함께 했던 로댕에게 '서사'가 보이는 것처럼.


3년 전부터 그 해에 일어났던 의미 있는 변화와 과제들을 ‘회고록’이라는 이름 아래 조금씩 적어놓았다. 누가 적어줄 정도로 위대한 사람이면 좋겠지만, 아무도 내게 그런 관심을 갖지는 않기에 나 혼자 스스로 적었다. 올해는 그렇게 적은 회고록 중 일부분을 브런치에 공유해볼까 한다. 분명 지난 3년간도 충분히 값졌지만, 이번 1년도 그에 못지않다. 지난 3년은 '시간의 풍요'로 점철된다면, 이번 1년은 '환경의 변화'가 적절할 듯하다. 환경은 내게 어떤 변화를 남겼나.



KakaoTalk_20191219_214329592_03.jpg 과연 한국에 있었다면 치킨을 만들어 먹을 생각을 했을까?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

나는 요리하는 동물을 본 적이 없다. 초식동물이라면 풀을, 육식동물이라면 고기를 먹었다. 그들은 어떤 양념도 없이, 생 것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그런 장면들을 볼 때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인간은 아니다. 인간이 조리되지 않은 날 것을 먹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여행을 갈 때도 가장 기대하는 것 중 하나가 식사시간이다. 새로운 양념이 들어가 색다른 맛을 내는 요리를 기대하면서 퍽퍽한 기내식을 참는 사람들도 많다. 식사에 큰 주안점을 두지 않는 나조차도 터키에서 먹었던 고등어 케밥이 생각날 정도니 요리는 인간 역사에서 빼려야 뺄 수 없는 문화다.

그럼에도 내게 음식은 누군가가 해주는 것이었다. 집에서는 부모님이, 식당에서는 식당 아주머니가 나를 위해 밥을 해줬다. 내게 필요한 건 제시간에 테이블에 앉는 것과 값을 지불할 수 있는 돈뿐이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내게 식사는 상대가 누군지가 중요할 뿐, 메뉴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고급 레스토랑에 가는 이유는 맛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한 번도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이 특별하게 맛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동명의 음식이라면 편의점 냉동음식이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내놓는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 정도로 미각이 둔하고 먹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맛집을 내 발로 직접 찾아가는 경우는 오로지 여행에서 뿐이다.

KakaoTalk_20191219_214329592_02.jpg 고향이 그리워 만든 LA갈비

Los Angeles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LA에서 한인 호스텔에 머물렀는데 감사하게도 아침과 저녁을 제공해줬다. 맛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못 먹을 수준은 아니고 그렇게 먹는 게 중요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주는 대로 먹었다. 그리고 밥을 주지 않는 일요일이나 점심은 간단한 즉석식품을 가져가 먹거나 밖에서 주로 사 먹었다.

이런 삶을 살았던 내게 필라델피아는 걱정 그 자체였다. 물가는 LA보다 저렴하지만 식사를 제공하는 숙소가 없었다. 내게 선택지는 나가서 사 먹던가, 요리를 직접 하는 두 가지 옵션뿐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요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아이패드를 사자마자 깔았으면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만 개의 레시피’ 어플에 접속했다.

레시피들을 보면서 약간 당황했는데 나는 요리에 이렇게 많은 재료가 들어가는지 몰랐다. 빨간색은 고추장, 검은빛이 감도는 건 간장을 베이스로 한 음식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그것만 들어가는 줄 알았다. 내 사전에 소스는 맛은 매운맛을 내는 고추장, 짠맛을 내는 간장, 그리고 소금뿐이었다.(설탕은 맛탕같이 직접적으로 단 맛이 나는 곳에만 들어가는 줄 알았다. 이렇게 설탕의 쓰임이 많았다니!) 자취 때 곧잘 해 먹었던 고추장 볶음밥은 이런 나의 철학에 기초해 소금, 고추장, 스팸만 들어갔다. 그런데 레시피에는 당근, 양배추, 김치, 햄, 밥, 계란 등 주재료는 물론이고, 맛을 내기 위해 고추장, 고춧가루, 설탕, 소금, 참기름, 물엿 등 종류가 상상 이상이었다. 게다가 이런 재료는 한인마트에서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LA보다 어려운 난이도였다.

처음에는 당연히 우왕좌왕했다. 처음부터 먹고 싶었던 고구마 맛탕을 한 번 해보겠다고 고구마, 설탕 등 레시피에 나온 것들을 사 가지고 집에 갔다. 그 날은 유난히 의욕이 넘쳐 그 날 저녁으로 먹을 스파게티까지 한 번에 준비했다. 고구마의 양이 적지 않아서 두 번에 걸쳐 설탕을 졸였는데 첫 번째 맛탕을 때깔 곱게 잘 만들어졌다. 문제는 두 번째다. 스파게티와 함께 준비하는 바람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중불로 중탕해야 할 것을 뜨거울 불로 오래 중탕하면서 고구마가 까맣게 그을리고 말았다.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탄내는 어쩔 수 없었다.

KakaoTalk_20191219_214329592.jpg 고구마 맛탕과 군고구마 맛탕


뿐만 아니라 잔치 국수를 했는데 간이 안 잡혀서 밍밍하게 먹기도 했고 기껏 만든 수제 돈가스를 태워버리기도 했다.(돈가스도 직접 했다.) 그럴 때마다 나의 무지한 미각이 잔반 처리에 보탬이 되었다.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닭갈비, 돼지 고추장찌개, 치킨, LA갈비 등은 성공적인 요리도 많이 있었다.

내가 평생 요리를 외면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요리는 아직까지 내게 필요 없는 기술일 뿐, 언젠가는 분명히 필요할 기술이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는 요소기도 하고 나 스스로도 전통적인 남성성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명절에 일손을 돕고 사랑하는 이에게 정성을 쏟은 식사를 대접하려면 요리는 필수였다. 마지막으로, 요리는 좋은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적절한 핑계 기도 했다.

나도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어 몇 번 시도해봤다. 요리 클래스를 등록해보기도 하고 주방에 기웃거린 적도 있다. 하지만 큰 동기가 없다 보니, 의욕도 금방 사라지고 차일피일 미뤄졌다. 배운 요리는 생각보다 까다로웠고 주방에는 알지 못하는 가루들만 수북했다. 전문가의 영역에 있는 것 같았다. 요리를 망칠 것만 같아 조금 두렵기도 했고 나중에 배우겠다는 게으른 생각도 있었다.

그런 내게 미국 생활은 큰 동기부여가 됐다. 친구들은 미국에서 인턴을 하고 있다고 하면 여행을 다니고 친구들과 행아웃 하면서 번지르르하게 지낼 것이라고 오해하지만, 실상은 정적인 삶의 연속이다. 좋게 말하면, 내 시간이 굉장히 많다. 시간은 많고 마침 경제적으로는 넉넉지 않으니 요리를 할 적절한 조건이다.

항상 ‘처음’ 이 어렵다. 처음엔 요리 준비하는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장도 매일 보고 양을 조절 못해 일주일 내내 같은 메뉴를 상에 올리기도 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성장하는 게 사람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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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를 제외하고 모든 음식은 Ingredient Origin입니다...


독서 플랫폼에 빠지다.

독서를 좋아하는 편이다. 항상 독서는 내게 노곤 노곤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지루한 존재기도 하지만, 그 노곤 노곤함을 극복하면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 올 때, 조금 걱정을 했다. 책을 못 읽기 때문이다. 전자책이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시도를 안 해본 건 아니다. 전자책을 몇 권 읽어봤지만, 책을 더럽게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전자책은 어딘가 어색했다. 내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책은 더 이상 내 책이 아니었다. 게다가 눈이 좋지 못한 내가 전자책을 종이책처럼 부담 없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미국에 오기 전에, 딱 한 권을 집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가장 중요할 것 같은 ‘워런 버핏의 주주서한’이다. 하지만 한 권을 깊게 읽기보다 여러 권을 가볍게 읽기를 좋아하는 내게 한 권이라는 한계는 조금 물리는 감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는 도중에 발견했다. ‘밀리의 서재’

밀리의 서재도 전자책 서비스다. 앞서 말했듯이, 전자책이 가진 조금 인공적인 느낌은 내가 책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책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활자 없는 삶이 지속되자 결핍증이 왔다. 찬물 더운물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활자가 부족한데, 내 정조를 지킬 수는 없었다. 게다가 1달 무료라는 괜찮은 제안에 현혹되어 덜컥 구독을 해버렸다. 구독료는 12000원. 12000원이면 이제 책 한 권도 사지 못한다. 인터넷으로 사도 14000원은 줘야 종이책을 살 수 있는데, 신간은 물론이고 다수의 책들을 볼 수 있는 건 굉장히 매력적인 요소였다.

꽤 만족하고 있다. 책은 다양한 쓸모가 있다. 여행을 가기 전에, 그 나라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책 만한 매체가 없고 넷플릭스, 유튜브 등 영상 매체를 즐기지 않는 내게 심심할 때 책만큼 유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래서 그들의 마케팅에 놀아나기로 했다. 덜컥 정기구독을 신청해버렸다.

이제 당분간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복학을 하면 전공 공부에 시간을 쏟아야 하고 방학이 되면 방학 나름대로 계획이 있다. 책은 내게 일이 아니라 취미니, 상황에 따라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곤 한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책을 좀 가까이할까 한다. 어차피 정적인 삶이라면, 동적인 삶을 그리워하기보단 이 나름의 절경을 만끽하는 것도 나름 운치 있지 않을까.

IMG_1830.PNG 분야를 가리지 않는 내겐 최고의 플랫폼이다. 내가 첫 번째로 구독하는 플랫폼이다.



한 걸음 더 빨리.


밀리의 서재는 참 좋은데, 단점이 있다면 영자 콘텐츠가 없다. 욕심이기는 한데, 미국까지 와서 한글로 된 아티클만 읽고 있으니 조금 자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평소에 관심이 있던 Business 매거진을 구독할까 하다가도, 어렵지 않을까 지레 겁을 먹었다. The Economist 혹은 The TIMES 같은 매거진은 최고 수준의 영어를 구사한다. 단어도 어렵고 내용도 어렵다. 풍부한 배경지식과 Native 영어실력 없이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매거진임은 분명하다.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 내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고민을 하는 사이에, 내겐 나름 큰 변곡점이 있었다. 영자 논문을 읽어 그 지식을 체득한 것이다. 나름의 Assignment였지만, 그래도 그 작은 성취가 내게 약간의 자신감을 줬다. 그리고 이것도 언젠가는 내가 헤쳐 나가야 할 역경이다. 우리가 보는 매스컴은 보통 2차 가공된 정보다. 첫 번째 정보는 로이터통신과 같은 영미권 언론을 통해 유입되고 이것들 중에 한국과 관련한, 혹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이슈들만 편집해 우리나라 매스컴에 실린다. 그 시차는 길게 2~3일이 걸리기도 한다. 즉, 영문 신문을 읽지 않으면 한 발 늦은 기사를 받는 셈이다. 예를 들면, 최근에 있었던 아람코의 상장이 사실상 선진 시장에서는 어렵게 됐다는 예상이 몇 달 전부터 보도되고 있었다. 뉴욕증시 상장은 911 피해 유족들의 고소 가능성 때문에 난망한 상황이었고 유럽의 런던 증시는 브렉시트라는 불확실성, 아시아의 홍콩 증시는 시위라는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아람코의 상장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할 수도 없는 것이 내년에는 이란 등 다른 산유국들이 석유 증산을 천명한 상태고 글로벌 컨센서스가 유가는 점진적인 하락을 예상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에 편중된 경제를 벗어나고자 스마트 시티 등의 사업을 계획하고 있는데 자금 조달을 위해서 아람코의 상장은 필수적이다. 이런 전 지구적인 역학 관계가 얽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기업 ‘아람코’는 뉴욕 증시도, 런던 증시도, 홍콩 증시도 아닌 타 다울 증시에 상장을 결정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뉴스가 한국어로는 며칠 늦게, 그리고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전달됐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이슈를 잘 따라가기 위해 영자 매거진을 읽는 건 필수였다. 시기가 문제였을 뿐. 그래서 분명히 처음에는 많이 어렵겠지만 미국에 있고 시간도 많아 구독을 신청했다. 분명 어렵고 포기하고 싶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소셜 미디어(https://blog.naver.com/dydals1002/)를 이용해 루틴을 만들고 있다. 아직 구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떻다고 논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좋은 변화를 불러일으키길 바랄 뿐이다.

IMG_1829.PNG The Economist, 제게 한 발짝 더 빨리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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