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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YA Aug 12. 2020

기회를 들이며,

Lifetime, Phase 2

 유난히도 더웠던 스물셋의 여름, 나는 언제나처럼 책상 앞에 앉았다. 어제의 나와 대면하고자, 오늘의 영감을 차분히 정리하고자, 내일의 나와 공유하고자 컴퓨터를 켰다. 어제의 나가 벗어던진 허물들이 남아있는 ‘문서들’ 폴더를 열어 아무 생각 없이 여러 생각들을 쭈욱 읽었다. ‘이런 일도 있었구나’, ‘저런 생각도 했었지’... 많은 생각이 오갔다. 수북이 쌓인 내 이야기를 다 읽고 나니, 순간 멍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은 뭐지?’

 내게 인생은 소설과 같다. 그리고 나는 내 소설에서 주(主) 인공이다. 자유의지가 내게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내게 주어진 선택지 중 나는 항상 최선의 선택지를 택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시절, 나는 지금까지 내게 주어진 선택지 중 최선의 선택을 항상 해왔다고 자부했다. 가슴 따뜻해지는 인사팀이 좋아할 만한 일화, 많은 여행으로 다져진 유연한 사고, 글쓰기라는 괜찮은 취미까지 두루두루 갖췄다. 그런데 내일은 없었다.

 인생은 소설이기에, 서사가 있다. 오늘 상처가 났기에, 내일 약국에 들른다. 살 떨리는 고백의 순간이 있기에, 내일의 연인을 기다릴 수 있다. 오늘이 어제가 되듯이, 내일은 오늘이 된다. 그러나 내 ‘문서들’ 폴더에 적힌 글들은 모두 경험, 인상, 영감이었다. 그 많은 글들이 모두 과거형이었다. 그 순간, 나는 찬란했던 젊은 날을 반추하며 푸념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내일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탓, 세상탓, 배경탓... 탓으로 귀결되는 뒷방 늙은이가 떠올랐다. 등골이 오싹했던 그 순간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일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미래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다. 무계획이 계획이라지만, 목적 없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목적, 목표를 위한 계획, 내겐 그것이 없었다. 여러 변화가 있었음에도, 아직 과거에 안주하고 있던 나를 어서 오늘로, 그리고 내일로 이끌어가야 했다. 그렇게 6개월이란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과거와 안녕을 고했다.      


 과거를 상징하던 여행을 보내며, 나는 새로운 이들을 맞이했다. 내 꿈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계기들을 하나씩 마련했다. 터키의 열기구, 미국의 야구, 태국의 등불이 사라지고 기름 냄새, 금속 가공하는 소리만 내 주변을 채웠다. 인생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주변은 북적였지만, 사실은 조금 정적이고 고요했다. 어제와 다른 내일을 맞던 나는 어제와 같은 내일을 맞았다. 주변은 지루하고 따분했으나, 나는 그 순간이 즐거웠다. 나는 새로운 자극에 매료됐다. 같은 것이라 생각했던 두 개념을 가르는 미묘한 차이, 개념의 변주를 보면서 희열을 느꼈다. 여러 종류의 책을 읽으며 쉽게 얻었던 Cheap Thrills과는 차원이 달랐다. 내 꿈에 조금 더 다가가는, 나 자신이 한 걸음 나아가는 새로운 자극이었다.

 사실 이렇게 번지르르하게 수식하기에는 내 한 걸음은 너무나도 미약하다. 단지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이다. 결과도 알 수 없고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결과를 알지 못하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고 더 높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약간의 확신이 버무려지면, 결과는 공포의 대상이 아닌 기다림의 대상이 된다. 그 날을 기다리자. 이 순간을 기념할 그 날을 기다리자.



That's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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