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YA Feb 21. 2021

수확의 계절

씨앗을 품은 열매

The Angelus, Jean-François Millet

 

 2014년 수학능력 평가라는 인생의 첫 관문을 넘기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렇게 맞이한 스물의 시작은 열의 끝과는 사뭇 달랐다. 더 포근하고 따사로웠다.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기가 넘쳤고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하지만 그 자유를 만끽하는 와중에도, 너무나도 평화로워 오싹한 한기가 밀려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언젠가는 젊음도 사라지리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젊음도, 시간도, 자유도 지금은 영원할 것처럼 굴지만, 어느 순간에 나는 그것들을 놓아줘야 한다. 조금은 섬뜩했지만, 나는 다행히도 그것들을 받아들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내 인생이 극적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자유가 사라진다고 해도 지금 자유는 내 곁에 있었고 젊음도 창창했다. 그럼에도 하나 바뀐 점이라면, 생각이 많아졌다. 모든 순간을 충분히 즐기되, 그 순간들을 허투루 버리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 행간의 의미를 찾고자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나는 하나의 서사를 완성하고자, 그 순간을 기록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내 노력은 ‘성실함’으로 다가왔다. 친구들의 눈에 나는 열심히 살면서, 잘 노는 모범생 정도로 보였으리라. 4점 대를 아득히 넘어서는 학점, 해외 인턴 등으로 무장된 스펙, 13개국을 다닌 여행 이력 등을 보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성실하다는 말이 조금은 거부감이 든다. 무언가 노예에게나 주어지는 훈장 혹은 칭호 같달까? 삼성의 독보적인 후계자인 이재용을 보고 우리는 성실하다며 칭찬하지 않는다. 억지로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는 말단 직원들에게나 우리는 ‘성실’하다며 칭찬한다.


 내 모든 과정에 억지는 없었다. 대학 공부도 목표를 찾고 나서는 항상 하는 것이었고 매번 1등을 하고자 달려들었다. 모든 과목에서 1등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하니 A+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해외 인턴도, 여러 서사가 있는 여행들도 마찬가지다. 돈이 남아서, 시간이 남아서 다녀온 여행이 아니다. 온전히 내 서사로 만들고자, 내 돈으로 내 시간을 들여 다녔다. 남에게 멋진 장소가 아니라 나에게 뜻깊은 장소를 찾아 헤맸다. 학생의 본분, 성인의 본분, 젊은이의 본분을 모두 챙기고자 누구보다 시간을 쪼개 살았다.


 나는 내 젊은 날을 후회 없이 살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길, 바라는 가치를 찾아 살아왔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 길을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이 목표를 이뤄낼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회가 갖는 가치관은 또 다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개별성을 주창한다. 이는 다원주의 사회를 설명하는 그리고 나의 가치관을 설명하는 썩 적절한 인용처다. 하지만 개별성은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지, 사회의 가치와는 다르다. 어찌 됐든, 국가에 헌신하는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는 정형화된 자격시험을 치러야 하고, 대학원을 들어갈 때에도 능력에 대한 평가가 수반된다. 아무리 개별성을 인정해도 사회라는 틀 안에서는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틀이 필요하다.


 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내 가치관에 대한 첫 번째 평가를 받는다. 이 사회에서 나는 내 가치를 지킬 자격이 있는지 묻는 시간이 다가온다. 수확의 계절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에게 중대하게 연관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각자의 개별성이 발휘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절은 중을 찾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