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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YA Dec 06. 2020

절은 중을 찾지 않는다.

스물의 시작은 주관식.

선택지는 당신의 몫.

 속된 말로 대학생활은 ‘누구와 먼저 친해지는지’에 따라 천치 만별로 달라진다. 우연히 나와 같은 팀에 있던 친구가 훗날 과탑을 찍는 인재라면, 나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학점을 따고 학교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이 밥을 먹고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레 친구들 무리가 가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친구들 무리가 대부분 ‘취업’을 바라면 취업시장으로 뛰어들고 대학원 ‘진학’을 바라면 그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한계는 자신이 보고 있는 세상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하는 오만에서 비롯된다. 가령, 내 주변 친구들이 모두 공부를 잘해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나는 ‘대학원 진학률’이 높은 학교로 인식을 하게 된다. 반면, 주변에 대기업 사원들만 가득하다면, 나의 목표 혹은 나의 표준은 ‘대기업 입사’가 된다. 다른 선택지를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여러 채널을 통해 알 수는 있다. 누가 꿈을 찾아 대기업이 아닌 스타트업에 합류했다더라, 창업을 시작했다더라 등등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저, 나와는 다른 한 종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대학은 정말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훗날 상장사 CEO도, 대기업 사장도, 저명한 학자도, 화목한 가정을 이룬 가장도 모두 대학이라는 사회 속에 있다. 이는 다양한 가능성을 상징한다. 그중 가장 큰 가능성은 ‘사람’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난다. 하지만 ‘다양한’ 사람을 만나지는 않는다. 가만 생각해보면, 주변에는 같은 지역 친구, 같은 학과 친구, 가족들 뿐이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다. 이 편중된 인간관계는 인과관계에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충분히 상관관계를 가진 가치관을 형성한다. 특히, 이는 진로 선택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중산층의 대기업 선호 현상 혹은 물질만능주의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이는 학창 시절에도, 사회생활 중에도 똑같이 부딪히게 될 인간의 한계다.


 지금까지는 부모, 고향, 선생님 등에게 가치관을 주입받았다면, 나는 대학이 유일하게 나의 가치관을 ‘형성’시킬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대학은 정말 많은 다양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내 옆에 있는 친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내 옆에 누구든지 둘 수 있는 것도 대학이다. 내가 기계과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 자연스레 나는 공학 혹은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공유하게 된다. 이들은 내가 전공 공부를 함에 있어서, 가장 많은 관계를 형성하는 집단이지만, 그렇다고 이들만이 내 대학 사회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조금만 품을 들이면, 누구든지 만날 수 있다. 경영학과, 철학과, 예술을 전공하는 학우들을 만나,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그중에는 훗날 스타트업 CEO, 학자, 자상한 아빠도 있다.

 단기간에 주변 환경도 극적으로 바꿀 수 있다. 이번 학기는 창업 동아리에, 다음 학기는 오케스트라에 참여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 이는 학창 시절에도, 훗날 겪을 사회생활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대학생만이 갖는 특권이다. 그 기회가 1년에 방학 2번과 학기 2번으로 총 16번이나 있으니, 그 기회를 놓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 발걸음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어야 한다. 절은 중을 찾지 않는다. 중이 절을 찾아야 한다. 만약 그 집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경계 넘어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맞는 주변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취업 스터디보다는 경제경영 동아리 혹은 창업과 관련한 사람들을 곁에 두어야 하고 높은 학업 성취를 얻고 싶다면, 교수님을 곁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작부터 확실한 선택지를 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학년부터 한곳에 집중한 사람은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시야가 좁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1학년부터 확고한 꿈을 가진 친구는 당시에는 멋있어 보이지만, 결국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러 기회를 놓치는 우를 범한다. 실제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소년 급제의 비참한 퇴장은 우리가 많이 겪어보았다. 어떻게 단번에 택한 카드가 광땡이겠는가.*

 열의 끝은 객관식이지만, 스물의 시작은 주관식이다. 스물은 어떤 것도 답안에 넣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이든 답이 된다. 하지만 전제조건은 내가 그 답안에 적을 답을 ‘알고 있어야’ 한다. 스물부터는 누구도 내게 무엇을 할 건지 물어보지 않는다. 누군가가 던지는 물음표는 취업이나 진학 같은 고리타분한 선택지들 뿐이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내 옆 친구도 들고 있다. 물론, 누군가는 이것들을 간절히 염원할 수 있다. 이들을 폄하하거나, 비난할 의도는 전혀 없다. 하지만 대학생은 모두 수학능력시험이라는 시험을 마지막으로 객관식에서 졸업했다. 기껏 주관식으로 만들어놨는데, 60만 수험생이 또 같은 선택지를 들고 경쟁을 한다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당신은 어려서부터 특별한 아이로 자랐다. 당찬 장래희망을 적었고 멋진 미래를 꿈꿨다. 그런 당신은 아직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다만, 선택지에 없을 뿐이다. 당신의 잠재력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 주변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어쩌면 바로 옆에 있을지도 모른다.      


Knock on Wood. 


* 본 글은 취업, 진학 등 진로를 대표적으로 예시로 들었지만, 인생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대학생활 동안 진탕 놀았던 추억이야말로 값진 순간이 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대학이 주는 기회다. 다만, 사랑, 경험, 추억 등은 주관적인 요소가 심하기 때문에 모두가 한 번쯤은 고민하는 진로를 예시로 들었다. 진로는 예시일 뿐, 본 글이 말하고자 하는 것 중 사소한 한 부분임을 명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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