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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YA Sep 02. 2021

2020년이 없었다면?

Singular Point 2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이 꼬인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내게는 2020년이 딱 그랬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2020년에도 계획이 있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후 개강까지 남은 4개월 남짓동안 무엇을 할지, 어떤 공부를 할지 그리고 어떤 대회에 나갈지 다 계획이 있었다. 대학원에서 인턴을 할 생각이었고 머신러닝이라는 분야를 공부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특허전략 대회라는 있어 보임직한 대회에 나갈 계획이었다. 그리고 (우스운 이야기지만,) 수상도 할 계획이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무계획이 가장 좋은 계획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우(최우식)의 질문에 기택(송강호)은 이렇게 답한다. 맞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나는 이 사실을 2020년에서야 깨달았다. 2020년은 내게 인생의 쓴맛을 줬다. 세세하게 짠 계획 중에 마음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미국에서 귀국한 후, 대학원에서 인턴을 하며 남는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던 나는 코로나19라는 세계 구급 이벤트로 취소됐다. 대신 머신러닝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지식들은 모조리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방학을 갈아 넣어 준비한 특허전략 대회에서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나 자신이 만족하지 못했다면, 좌절의 연속에서도 살아남았을 테지만, 나는 항상 자신했다. 대회에서 수상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수상은 가능성이 아니라 당위였다.      


 다행히 나는 현실의 쓴맛을 보고 세상이 부조리하다느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둥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나 자신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오만했던 나 자신을 바라보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나는 내가 추구하는 방향에서 어디쯤에 있는지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의 위치, 한계, 역량들을 들춰냈다. 그렇게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를 주름잡던 소피스트들을 만나면서 좌절했다. 그가 만난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몰랐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세상은 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늘은 동그랗다. 하지만 세상은 둥글고 하늘은 시각의 착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니, 그것조차 현상일 뿐이다. 본질은 아니다. 

 ‘앎’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배움의 과정이 있는 것이고 자신을 채울 수 있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 소피스트들은 그러지 못했다.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양, 모든 세상을 아는 것마냥 이야기를 하는 소피스트들을 보면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자신이 가장 현명한 사람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나는 24년이나 지나서야 이 배움의 근원을 이해했다.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독서를 하면서도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라며, 모든 것은 내 계획대로 이뤄진다는 확신(자만) 속에 살았다. 좌절을 겪고 나서야, 나의 한계에 다다라서야 나는 나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2020년은 내게 많은 변화를 줬다.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지극히 자명한 명제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좀 더 겸손해졌다. 아무리 잘 아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며 기회들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현상 속에 가려진 본질이 무엇인지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연하다며 넘겼던 개념들에도 ‘왜?’라는 질문이 절로 나온다.

 물음표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그 물음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나는 모른다. 그 모든 시간 속에 내가 모르는 의미가 담겨있으리라는 생각에 다가올 기회와 시간들이 기대가 된다. 이런 것들에 비하면, 2020년이 준 약간의 좌절은 아무것도 아니다.     

 ipse se nihil scire id unum sci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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