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은 자기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요한복음 15:9~17[200주년 신약성서]
11 내가 여러분에게 이런 일들을 말한 것은 내 기쁨이 여러분 안에 있고 또한 여러분의 기쁨이 가득 차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
13 누가 자기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아무도 지니지 못합니다.
14 내가 여러분에게 명하는 것을 행하면 여러분은 나의 친구들입니다.
AI와 빅데이터의 기술로 세계가 뜨겁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놀라울 정도로 생활을 편리하게 만듭니다. 냉장고 안에 카메라가 식료품을 분석해서 부족한 것을 장바구니에 담은 배달 플랫폼의 주문 창까지 띄어주는 일, 그리고 개인비서처럼 개정의 다이어리 일정표를 분석하여 기차나 비행기 예매, 공연, 전시 예매를 최적의 시간대로 잡아주기까지 합니다.
남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떠맡아 일해주는 것도 엄연히 사랑의 영역입니다. 그것도 빠르게 정보를 찾아 불편한 상황이 오지 않도록 미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은 현대인에게 합리적 비용을 지급하는 일로 고마움을 표현하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점차 최신 기술이 적용되고 편의가 향상될수록 사람들은 더 강도 높은 서비스를 기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편의를 위한 사랑은 노예의 굴종적 태도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15절, “사실 종은 자기 주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런 사랑에 익숙해지는 게 조금은 두렵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관심이 끊어진 사회라면 그것만큼 섬뜩한 게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사회의 곳곳에서, 타인과 세상이 욕망과 자본의 원리로 인해 매도되는 걸 느낍니다. 대상으로부터 받을 편의와 서비스만을 기대하는 마음, 손익을 기준으로 계산된 타인의 가치, 현상과 결과만 있고 존재와 과정이 제거된 공동체, 좋고 나쁨으로만 판별하려는 단순한 가치 인식.
11절 “내가 여러분에게 이런 일들을 말한 것은 내 기쁨이 여러분 안에 있고 또한 여러분의 기쁨이 가득 차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동성애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대다수의 개신교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섬뜩함을 느낍니다. 그 교회들은 동성애자들과의 교감을 철저하게 거부합니다. 오직 자신들의 구원만 있습니다. 마치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구원에 있어서 방해물인 것처럼 여깁니다. 주인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노예의 굴종적인 태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악의적으로 상상하는 더럽고 타락한 모습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일상을 살고 싶을 뿐인데. 교회가 이웃에게 기쁨이 아니라 혐오와 차별을 전해주는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14절, “내가 여러분에게 명하는 것을 행하면 여러분은 나의 친구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친구가 되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나의 삶에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고 주를 따라 걷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의 사랑이 내 삶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도 사랑이 온전히 전해져야 합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친구들이라면, 예수님께 받은 사랑이 예수님의 친구들을 통해 아름다운 열매로 맺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들은 혐오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말씀 앞에서 저를 돌아봅니다. 나의 편의를 위해 정작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무관심한 삶을 살고 있던 건 아닌지, 주님의 사랑을 편의를 위한 서비스처럼 받기만 하며 가벼운 사랑으로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이웃과 교감하며 동질감 속에서 함께 기쁨으로 나아가고 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주님, 누군가의 진실한 친구이자, 인간이 되게 하소서.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 이 세상의 외로움을 걷어내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