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에세이

어둠의 빛

'어둠과 공허'와 '날 것'이 낳은 자식들

by 노에시스



해 질 녘은 밤이 찾아오는 시간이다. 처마 밑 그리고 골목 진 길 구석구석마다 어둠이 서서히 배어들기 시작한다. 검게 물드는 과정 속 인간의 의식에도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부드럽게 스며든다. 조심스러워지는 걸음, 오래 머무는 두 눈, 고심이 담긴 몸짓이 밤을 맞이한다. 밤은 어려운 손님이기에 그렇다.



밤은 손님처럼 다가와 주인이 되려고 한다. 그의 강퍅한 손길은 악수를 청하는 게 아니라 만나는 것들마다 검은 보자기를 씌워버린다. 그러면 먼저, 시간의 고유성이 감춰진다. 달빛만이 그를 아련히 기억할 뿐이다. 시간의 떨리는 몸짓이 얼마나 처량했던지, 모두가 밤을 거역하지 못한다.



밤의 웅장한 걸음을 앞서 본 태양이 겁에 질려 몸을 숙였다, 그가 숨자,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던 하늘도 밤에게 얼굴을 붉히면서도 순순히 자리를 내준다. 숲의 식물과 곤충, 동물도, 이뿐만 아니라 흥에 겨우면 몸짓하는 법을 아는 모든 것들은, 밤의 제복을 입고서, 검은 바위가 된 듯이 곤히 눈을 감고 밤을 품는다. 밤은 자기의 제국을 이룩하는데 저항의 아우성마저 잠재운다. 밤은 규칙과 변칙을 넘나들며 춤을 추기에, 가히 경이로운 경지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밤은 순간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패왕처럼 모든 만물을 발아래에 둔다. 그가 왕좌에 앉을 때에 긴 밤이 세상을 오래 통치할 거란 다소 암울한 암시가 뒷길에서 들킬까 조곤조곤 울려 퍼질 뿐이다.



밤의 풍경을 보는 몇몇 이들은 안다. 밤이 만에 하나 횡포를 부릴지라도 밤은 지나간다는 것을. 그래서 공포스럽지가 않다. 내일을 망각하지 않는 자는 밤에게 건넬 아쉬운 작별 인사를 준비한다. 세장을 뚫고 나가는 새처럼 뛰던 심장도 금세 수그러들게 하고, 밤은 다시 모두를 놔주고서 고유한 일상 안으로 다시 들어서게 한다.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에 균형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렵다.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에 사이에는 아련한 어둠(밤)이 있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이 혼재된 듯한 잿빛 하늘처럼 어둠은 숙연하게 만들고 움츠러들게 만든다. 책에 다음 장을 넘기는 찰나의 순간에도, 다음의 장소로 걸음을 옮겨 선 관문 앞에서도 여백을 만들어 낸다.



여백이 길어지면 불안과 여백이 만나 어둠과 공허로 변한다. 수많은 생명이 약속이라도 한 듯 부동의 움직임을 취하는 늦은 새벽의 고요, 세상의 모든 소리를 한 번에 토하듯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들의 향연, 하얀 경이로움 안으로 대지를 덮는 장대한 설산의 장관, 세상의 경계를 가르는 해수면 위의 지평선, 그들의 이름은 어둠과 공허이다. 그 안에서 움틀 거리는 생의 약동에서 어둠의 빛은 만들어진다.



어둠의 빛은 거대하고 숭고한 사명을 지녔다. 그 사명은 가치들에 대한 그릇으로서 존재다. 인간의 이타심과 이기심에도 자리 잡고 있다. 이타심은 상대의 보이지 않는 삶의 흔적들 속으로 내 의식이 들어가는 여정이다. 그 여정은 어두컴컴한 험로를 거쳐야만 한다. 편견과 아집의 암벽을 넘어가야 하며 경멸의 늪을 해치고 나와 허망의 강을 건너 마지막으로 이성의 암벽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이타심의 능숙한 자아는 규칙과 변칙의 조화 속에 그것이 춤이 되어 경쾌하게 모든 관문을 쉽게 빠져나오며 어둠과 공허의 속에서 불안 떨지라도 타자의 자아 역시 춤추게 한다.



이기심은 내 자아를 이롭게 하는 마음으로서 보이지 않는 내 자아 안으로 의식이 본능을 따라 깊이 빨려 들어간다. 자아의 깊숙한 욕구에 도달하는 여정으로 모든 만물의 가치가 자아의 격에 따라 그 여정의 도구로 사용된다. 유년기의 아이들에게 부모, 장난감, 생리적 욕구가 되며 기회주의자들에게 우정, 사랑, 동료, 삶의 배경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의 시간과 노력, 능력을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은 장인과 같다. 인간은 어둠과 공허가 받들고 있는 내면의 심연에서 그 무엇도 될 수 있으며, 이기심의 여정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심연에 도달하려는 무모함과 같으며, 우리 내면의 어둠과 공허에 불안이 깃드는 것을 걷어내고 어둠의 빛을 찾는 용맹함과 같다.



공허와 어둠은 ‘날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날 것’들은 늘 세상과 단절된 동굴에서 발견되기 쉽다. 그것을 동굴에서 찾게 된다면 인간의 오감을 총동원해 더듬거리기도 하고 몸을 비벼대 보고 코를 씻고 냄새를 맡아보고 그것의 소리를 들어 총력의 노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날 것’인지 알기 힘들다. ‘날 것’에는 강한 힘이 있어 신도 잘 범접하지 않는다. ‘날 것’은 빛을 어둠인 양 몰아내기도 하며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들도 날 것을 탐하게 하는 속성을 지녔다.



날 것의 소리를 듣는 이가 있어 고뇌하는 자에게 진리를 속삭여주는 잠언의 노래처럼 세상의 곡하는 소리를 아름다운 삶의 예찬으로 변화하게 할 것이다.


날 것의 냄새를 맡는 이가 있어 세상을 정화하는 아름다운 향기를 모든 곳에 풍겨 썩은 악취를 풍기는 악들을 제거하고 박멸할 자생의 능력이 온 땅에 펴질 것이다.


날 것의 모양을 보는 이가 있어 정형화되어 있는 틀로 인간 짓누르는 고문 도구들을 파괴할 힘을 얻게 될 것이며, 경직된 자들의 뇌에 생기를 불어넣어 포용의 생기를 온 땅에 퍼트릴 것이다.


날 것의 감촉을 느끼는 이가 있어 생기를 잃어가는 인간들을 다시 치유할 것이고 죽은 이들의 감촉에 숨을 불어넣을 것이다.



이 날 것은 동굴 깊숙한 곳에서 그 흔적도 찾기 어렵지만, 날 것의 자식들은 어둠과 공허 속에 작은 빛을 내고 있다. 솔직함, 진솔함, 따뜻함, 현명함, 슬기로움, 지혜, 인정, 인내, 온유, 사랑, 우아함, 아름다움, 성실, 근면, 건실, 포용, 관용, 감사, 격려, 등등 언제나 어둠과 공허가 낳는 아련한 어둠의 빛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날 것’의 자식들이다.



날 것에 힘이 있어 인간은 서로 교감하고 관련짓고 싶어 하고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일부가 되고 싶고 하나의 생명을 이루고 싶어 한다. 날 것에는 밀어내는 힘이 있어 다른 자식들도 존재한다. 질투, 분노, 침울, 슬픔, 근심, 의심, 지배, 복종, 파괴, 분리, 공황, 방황, 고독, 외로움, 등등이 있다. ‘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곳, 모든 가치가 불안에 떨다가 끝내 주인의 자리를 내어주고 종이 되어버린 그들의 자리는 심연이다. 그 자식들은 두 갈래로 갈리어 심연과 어둠의 빛에 각기 다르게 터를 잡았다.



인간은 늘 어둠의 빛이 손짓하는 신호를 기다리며 찾아야만 한다. 그것만이 ‘날 것’의 힘으로 모든 가치를 담고 있는 어둠과 공허로부터 생의 힘을 찾아낼 수 있다. 삶의 추억들을 끄집어내려는 노력은 자극을 받았던 찰나에 한 장의 사진만 떠오른다. 이는 우리의 삶이 번쩍이는 번갯불과 같은 짧은 생애라는 걸 늘 희로애락의 순간에도 한결같이 예고해 준다. 다만 우리 생이 긴 밤의 시간 중에 찰나라고 할지라도 번쩍일 수 있는 번갯불 같은 인생, 변칙적으로 역동하는 그 불빛이 경쾌한 춤이 된다면 어둠과 공허를 밟고 지나갈 수 있으리.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