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온기

아삽의 시 묵상

by 노에시스
시편 78:40~55[새 번역]
78:40 그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얼마나 자주 반역하였던가? 황무지에서 그를 얼마나 자주 괴롭혔던가?
78:41 그들은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78:42 그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건져주신 그 날도 잊어버렸다.
78:43 하나님이 이집트에서는 여러 가지 징조를 보이시고, 소안 평야에서는 여러 가지 기적을 보이셨다.
78:44 강물을 피로 변하게 하셔서, 시냇물을 마실 수 없게 하셨다.
78:45 파리를 쏟아 놓아서 물게 하시고, 개구리를 풀어 놓아 큰 피해를 입게 하셨다.
78:46 농작물을 해충에게 내주시고, 애써서 거둔 곡식을 메뚜기에게 내주셨다.
78:47 포도나무를 우박으로 때리시고, 무화과나무를 된서리로 얼어 죽게 하셨으며,
78:48 가축을 우박으로 때리시고, 양 떼를 번개로 치셨다.
78:49 그들에게 진노의 불을 쏟으시며, 분노와 의분과 재앙을 내리시며, 곧 재앙의 사자를 내려 보내셨다.
78:50 주님은 분노의 길을 터 놓으시니, 그들을 죽음에서 건져내지 않으시고, 생명을 염병에 넘겨 주셨다.
78:51 이집트의 맏아들을 모두 치시고, 그의 힘의 첫 열매들을 함의 천막에서 치셨다.
78:52 그는 백성을 양 떼처럼 인도하시고, 가축 떼처럼 광야로 이끄셨다.
78:53 그들을 안전하게 이끄시니,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의 원수들은 바다가 덮어 버렸다.
78:54 그들을 거룩한 산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그 오른손으로 취하신 이 산으로 이끄셨다.
78:55 여러 민족을 그들 앞에서 몰아내시고, 줄로 재어서 땅을 나누어 주시고, 이스라엘 지파들을 자기들의 천막에서 살게 하셨다.



사람은 기억 속에 생명의 온기를 품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살결과 숨결의 기억이 겹겹이 쌓이게 되면 사랑도 깊어집니다. 정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도 그가 정겨운 건, 나의 기억 속에 그가 살고 있어서지요. 생명의 교감에 관한 이야기들로 기억이 풍성해질수록, 그것은 아름다운 화원이 되어 삶을 지탱해주는 주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억에 의해, 인간은 정보 덩어리가 되기도 합니다. 생존을 위한 원초적인 본능에 이끌려 산다면 말이지요. 오직 이익과 수단으로써 관계가 빈번히 재단될 때, ‘살기가 퍽퍽하다’, 같은 생각과 말을 하곤 합니다. 욕구가 기억을 통제하기 시작하면, 먹고 살기 위한 노력이 먹기 위한 인생이 되고, 인간이 인간의 탐욕에 의해 도구화되고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시인이 살던 시대에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오랜 기억을 불러옵니다. 한때,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반역하고 시험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기억을 끄집어 옵니다(40~41절). 그것은 그들이 욕구에 의해 기억이 사로잡혀 더 높은 가치, 그들을 자유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던 기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해방되었습니다. 피라미드 같은 이집트의 건축물은 고귀한 고고학적 산물이면서, 동시에 당시 이집트의 우월함을 다른 나라에 과시하기 위한 착취의 산물이기도 하지요. 열 재앙 사건은 이들의 우월성에 사로잡힌 오만함을 꺾는 사건이었습니다.


시인은 열 재앙 사건을 이집트인들이 받은 피해를 중심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43~51절).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열 재앙 사건을 이집트 신들을 심판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여호와 하나님의 우위를 나타냅니다. 이와 다르게, 시인은 열 재앙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대적을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폭력에 저항할 수 없던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시인은 약자의 고통과 슬픔에 침묵하지 않고 반응하시는 분이었다는 걸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시인은 출애굽의 여정에서 하나님을 양 떼를 돌보는 목자에 빗대어(52절) 표현합니다. 목자와 양은 생명의 교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양 떼가 두려워 떨지 않도록 감정을 살피고 돌보는 일은 목자가 대상을 동등한 생명으로 인식할 때 가능합니다. 이 장면에서는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따라서, 시인은 광야의 기억을 통해서, 하나님의 온기로 가득한 마음을 기억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기억은 단순한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갈지를 결정짓는 생명의 토양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의 길을 걷게 됩니다. 기억 속 온기의 감각이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시인이 고백한 하나님의 온기를 떠올려 봅니다. 살결을 맞대고 숨결을 느끼며 온기의 감각을 느꼈던 지난 모든 순간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온 우주에 흐르는 온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금 말씀 앞에 선 제게로 이어져 흐르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하나님은 기억의 저편에서도 방황하는 영혼을 건지시고 인도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오, 주님, 기억이 생명의 온기로 채워지는 삶이 되도록 이끄소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