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기억에게, 다시 기억으로

에단의 시 묵상

by 노에시스
시편 89편 38~52절[새 번역]
89:38 그러나 주님은,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서 세우신 왕에게 노하셨습니다. 그를 물리치시고 내버리셨습니다.
89:39 주님은 주님의 종과 맺으신 언약을 파기하시고, 그의 왕관을 땅에 내던져 욕되게 하셨습니다.
89:40 주님께서 모든 성벽을 허무시고, 요새를 폐허로 만드셨습니다.
89:41 길로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를 약탈하고, 그는 이웃들에게 수치거리가 되었습니다.
89:42 대적들의 오른손을 치켜올려 주셔서, 원수들만 기뻐서 날뛰게 하셨습니다.
89:43 또 그의 칼날을 무디게 하셨으며, 전쟁터에서 그를 돕지 않으셨습니다.
89:44 그의 영광을 끝나게 하시고, 그의 왕위를 땅바닥에 내던지셨습니다.
89:45 주님은 또한 그의 젊은 날을 줄이시고, 그를 수치로 덮으셨습니다. (셀라)
89:46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영영 숨어 계시렵니까? 언제까지 주님의 진노를 불처럼 태우려고 하십니까?
89:47 내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모든 인생을 얼마나 허무하게 창조하여 주셨는지를 기억해 주십시오.
89:48 산 사람치고 어느 누가 죽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제 목숨을 스올의 손아귀에서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 (셀라)
89:49 주님, 주님의 신실하심을 두고, 다윗과 더불어 맹세하신 그 첫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89:50 주님, 주님의 종들이 받은 치욕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뭇 민족이 안겨 준 치욕이 내 가슴 속에 사무칩니다.
89:51 주님, 주님의 원수들은 주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깔보며 가는 곳마다 모욕합니다.
89:52 주님,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십시오. 아멘, 아멘.





인간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떤 기억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가.


시편 89편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해 남유다 왕국이 멸망했거나 그 파국으로 치닫던 시점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며,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셨던 언약이 무너진 듯한 현실과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읽으며 저는 ‘기억’이 단지 감정들로 범벅된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존재를 심연에서 일으켜 세우는 울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기억은 회한이자 소망이며, 인간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다시 일으키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시는 마치 한 편의 성화 작품 앞에 서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저는 이 시편 89편에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모호하게 조각나 있던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기억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기억의 회복은 예술과 신앙, 언어와 침묵이 만나는 가장 진실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기억은 밀도를 만듭니다. 회화에서 밀도란 단지 붓의 무게나 색의 농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복된 붓질 속에 스며든 작가의 삶과 열망, 실패와 환희의 누적된 흔적이며, 개별 작품을 가능케 한 예술사적 전통과 미학적 문법의 결정체입니다. 이러한 밀도는 화가의 손끝에서 비롯되지만, 동시에 그를 형성한 기억의 지층에서 출발합니다. 에로스와 고통의 교차점으로서의 예술은 그 기억의 상흔을 통해 존재의 깊이를 드러내며, 결국 기억은 예술이 지니는 실존적 울림의 중심에 자리하게 됩니다.


따라서, 기억은 영혼의 성소입니다. 대지의 왕국과 인간의 육체가 파괴된다 할지라도, 기억은 여전히 생명이 숨 쉴 수 있는 최후의 공간이 되어 줍니다. “내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모든 인생을 얼마나 허무하게 창조하여 주셨는지를 기억해 주십시오(47절).” 반복되는 이 ‘기억’의 요청은 단지 인생의 유한함을 토로하는 탄식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더욱 깊은 기억의 지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인간은 붕괴를 겪을 때 기억을 살핍니다. 언제 어긋났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말 한마디가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되짚어 봅니다. 기억은 과거의 틀에 구속된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며 세계와 세계를 잇는 자유로운 선이기 때문입니다. 기억이 끊기면 존재는 소외된 채 세계와 단절을 겪습니다. 더는 불려지지 않는 이름, 더는 회상되지 않는 얼굴, 더는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는 결국 잊힌 자의 숙명처럼 무의미의 바다에 전복되고 맙니다.


시인은 기억을 점검합니다.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며, 하나님의 약속이 철회된 듯 보이는 현실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셨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해 냅니다. 그것은 상실의 불안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소망이었습니다. 언약의 기억이 소망일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주신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잊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시인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잊지 않을게요.

당신을 기억할게요.

영원히 기억될 거예요.



기억의 의지에는 영적인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기억은 과거의 사건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재와 미래로, 물질과 정신을 초월하여 영원으로 뻗어나가는 영적인 힘을 지닙니다. 기억은 유한한 존재를 영원의 차원으로 이끄는 성소입니다. 시인이 “산 사람치고 어느 누가 죽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제 목숨을 스올의 손아귀에서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48절)”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기억을 이어가며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모든 것을 갈라놓을지라도, 기억은 한 사람을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억은, 왕국의 찬란한 번영과 몰락 사이 그 틈을 지나, 마침내 연약한 한 개인의 생애의 구원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시인은 지금 기억의 성소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는 기억의 정보와 구조를 더듬으며 길을 찾습니다. 마치 우주의 고요한 공간 속을 표류하는 작은 별처럼, 해석되지 않은 기억은 감정과 생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의미를 상실한 구조는 막다른 길에 이른 것 같이 절박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시인은 해석되지 않은 기억의 미로를 더듬으며, 결국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신 그 사랑에 기대어 절박하게 호소합니다(49절). 그 사랑은 귀가하던 자녀가 길을 잃었을 때 마중 나오는 부모의 사랑처럼, 우리를 수치와 치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도서 감상문을 쓰기가 어려워 ‘해피 000’이라는 사이트에서 누군가의 글을 사서 제출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수업의 교수님은 제게 여러 차례 물으셨습니다. “정말 네가 쓴 것이 맞니?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보렴.” 교수님의 훈계는 한 학기 수업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몇 번의 거짓말을 했는지 모릅니다. 매 순간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고집스러운 제 자신도 미웠고, 결국 교수님은 제 글이 아니란 걸 아시면서도 B+ 학점을 주셨습니다. 그 점수는 저에게 씻을 수 없는 거짓의 상흔이 되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저는 언제나 진실함에 코가 꿰어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수치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 기억은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네가 신을 믿을 자격이 있는가”와 같은 물음들로 저를 고뇌의 감옥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기억은 저를 각성하게 만든 감사한 자극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타협과 편의의 냄새를 본능적으로 감지하며 살아가는 저 자신을 바라볼 때면, 어딘가가 여전히 쓰라립니다.


기억이 기억에게로, 다시 기억으로 흐릅니다. 기억은 또 다른 기억을 흔들고, 지워지지 않은 약속처럼 조용히 우리 곁에 머뭅니다.



그 자리에 평안과 안식이 깃들 수 있을까요?

구원받은 기억은 다시금 누군가의 기억을 살려낼 수 있을까요?

제 기억 또한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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