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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밍꼬 Jul 27. 2021

인생은 지금부터

밍꼬야 파이팅, 인생은 언제나 지금부터

                                          

  어렸을 때부터 나는 엄청난 머리숱을 자랑했다. 양갈래로 묶으면 한쪽이 다른 사람이 전부를 묶은 것보다 많았다. 엄마는 머리를 묶을 때마다 이리도 많으냐며 한 올이라도 빠질까 양 눈이 째지도록 묶어 주셨다. 나이가 들수록 풍성한 머리숱과 깨끗한 피부가 명품보다 났다던데 그 많던 머리카락이 그립다. 소중한 머리카락이 어디로 가버렸냐면, 내 나이 19살 수험생 시절을 보내며 다 보내버렸다.     


   초등학교 내내 있는 듯 없는 아이였던 나는 중학교에 올라가서 처음 치른 중간고사에서 기대 이하의 점수를 받았다. 결과에 놀라고 자존심이 상해서 공부를 하였는데 하다 보니 제법 성적이 나왔고 성적이 오르니 재미가 붙었다. 교사였던 엄마 덕에 어느 학교 누구 선생님 딸이라는 시선은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고 시험지에 동글동글 매겨지는 채점아름다웠다. 깔끔하게 나오는 한자릿수 석차는 내 자존심이 되었다. 갈수록 더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변수가 찾아왔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을 공부하는 내신은 자신 있었지만 모의고사 점수는 한참을 밑돌았다. 학교 성적처럼 수능도 공부를 하니 점수가 오르더라 하고 싶지만 인생의 단맛을 그리 자주 찾아오지 않았다. 특히 ‘120점 만점의 언어영역’은 ‘80점 만점에 영어 점수’와 친구를 하자며 비슷한 점수로 늘 근처에 머물렀다. 그래서 나는 내신을 앞세워 수시로 대학에 가고자 했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관악산을 품은 학교부터 당연히 합격할 거라 생각했던 모 여대까지 가고 싶은 학과에 소신 지원을 했지만 1차 합격도 되지 않고 모두 떨어졌다. 입시 정보도 전략도 없는 순진한 돌진이었다. 나는 중학교 때 부회장 한 번이 전부인 ‘성적’만 있던 인생이었다.


    2학기 때는 소신을 많이 굽혀 적당히 학과도 바꿔가며 수많은 학교에 지원했지만 겨우 몇몇 학교에서만 면접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실패의 결과는 나에게 1년 내내 통보되었다. 하나의 탈락을 확인하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또 다른 불합격 소식이 내 정신을 후려쳤다. 시간이 갈수록 나보다 뒷 석차의 아이들도 어딘가에 합격하여 수업시간에 여유롭게 앉아있는 모습을 볼 때면 쓰릴 속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르지 않던 모의고사 점수는 이런 상황에서 오를리가 없었고 처음 경험해본 실패는 처참했고 아팠다. 나의 엄마는 내가 선택한 고등학교가 인성 교육을 중시하더니 공부는 안 시키고 이렇게 되었다며 이 학교를 선택한 3년 전으로까지 돌아가서 원망하고 있었다. 불합격 인생이 되어버린 19살의 나는 아무 데도 기댈 곳이 없었다. 1년을 내내 이러고 있으니 얼굴빛은 더없이 검게 변했고 스트레스에 머리카락이 줄줄 빠졌다. 성적은 그 시절 못난 를 확인시켜주던  전부였는데 한낱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그렇게 수능 날이 되었고 나는 패배자가 될 것이 분명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이러할까. 떡볶이 코트를 입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경복궁 근처 여고로 수능을 보러 향했다. 낯선 학교 앞에는 모교의 후배들이 북과 꽹과리로 신나게 원하고 있었지만 누가 나를 알아볼까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교문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팔을 잡아들고 얼굴을 며 말하였다.    

 

“밍꼬야! 힘내라!! 끝난 게 아니다.

인생 지금부터야 파이팅!”    


  후배들과 함께 응원을 나온 고1 때 담임선생님이었다. 넘치는 열정에 아이들과 부딪히며 지내다 정들어버린 나의 스승님, 예상치 못한 등장과 응원의 말이었다.   

  


   수능 점수는 나왔고 결과는 정직했다. 서울의 끝자락인 듯한 경기도 어디, 가고 싶던 심리학과가 특화된 곳에 입학하였다. 3월 꽃샘추위에 어수선한 지하철역에 내려 심리학개론 첫 수업을 들으러 가는 날, 설레는 신입생들 사이에서 나는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1-2년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 밖을 맴돌았다.


   대학에 정을 못 붙이던 때, 애정이 많던 고등학교에 한 번씩 갈 때면 선생님들은 결과가 아쉬우니 재수를 하라고 하셨지만 나는 의지가 없었다. 용기도 없었다. 다시는 못 할 것 같았다. 겨우 숨만 쉬듯 지내며 무엇을 해야 내가 살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변명이자 자기 위로처럼 다른 것들을 경험하며 좀 돌아간다 생각했다. 엄마가 말하는 ‘남들 다가는 대학에 못 가서’ 실패한 인생이라는 자괴감이 들 때면 BGM처럼 ‘인생은 지금부터’라는 말이 자동 재생되었다. 실패한 수험생은 무엇이든 하려고 부딪혔고 덕분에 나의 20대는 참으로 알찼다.

  이후에 원하는 대학원에 입학하고 졸업을 한 뒤에도 병아리만 한 지식밖에 없어서 또 [인생이 지금부터]던데 그때는 시작도 안 한 내 인생이 왜 실패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가을이면 예쁜 교정에 떨어진 낙엽들을 빗자루에 모터가 달린 쓸고 계시던 선생님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어린이도 어른도 아닌 그때, 실패 속에 외롭게 서있던 나에게 [인생은 지금부터]라고 말해주던 나의 선생님. 한 번의 실패가 온 인생의 실패가 아니라고 말해준 나의 진짜 어른이었다.     


  그리고 지금 30대 후반 아이가 넷에 경력단절 8년 차지만 여전히 [인생은 지금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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