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악스럽고 천진난만하게 놀아보자
우리 집 사남매 중 유일한 아들이자 나에게는 첫 남자아이인 산봉우리가 세 살 때 일이다. 아빠를 꼭 빼닮은 산봉우리는 나 어렸을 적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전형적인’ 남자아이다. 통나무처럼 단단한 체형에 힘도 강해서 몇 년씩 멀쩡하던 장난감도 툭 하고 부러트린 적이 여러 번이다.
이런 산봉우리 주변에는 여자가 많다. 집에는 누나 두 명과 여동생, 어린이집에서 반 친구들은 모두 여자이다. 그래서 산봉우리는 소꿉놀이도 좋아하고 누나들의 원피스를 입고 시크릿 쥬쥬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한다. 그렇지만 언제부터는 알려 주지 않아도 장난감 통 구석에 숨어 있는 자동차를 찾아와 혼자 놀기 시작했다.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도 중장비 차와 공룡 앞에서 넋을 빼는 모습을 보면 남자아이는 다르긴 다르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산봉우리가 이렇게도 저렇게도 다양하게 노는 모습을 보며 요즘 시대에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겠다고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반기 산봉우리의 어린이집 상담이 있는 날이었다. 동생이 생긴 후로 떼가 늘긴 했지만 셋째이다 보니 눈치도 있고 애교도 많은 산봉우리였기에 어린이집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상담에서 아이는 어린이집에서도 선생님과 친구들 모두와 잘 생활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상담의 마무리쯤 상담을 하던 원장님이 머뭇거리며 다른 이야기를 꺼내셨다.
“어머니, 학기 중에 다시 적응하는 일이 어렵겠지만 산봉우리를 다른 반으로 옮기는 게 어떨까요?”
원장님은 나에게 재차 집에서는 산봉우리가 어떻게 노는지 물으며 다음 말을 이으셨다. 산봉우리가 오전에는 혼자 자동차를 가지고 노는데 같은 반 여자아이들은 관심이 없기 때문에 오전 시간 내내 혼자 논다고 했다. 친구들과 함께 놀려면 산봉우리가 여자 친구들이 좋아하는 소꿉놀이는 해야 하는데 아무리 소꿉놀이를 좋아하는 산봉우리라도 종일 여자아이의 놀이만 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최근 아이가 자유 놀이 시간에 재미를 못 느껴하고 매번 선생님이 놀아줄 수 없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세 살 아이가 자동차만으로 혼자 놀고 있으니 재미는 없고 그래서 산봉우리의 놀이는 항상 짧게 끝났다고. 그러다 오후가 되면 산봉우리는 답답한지 자동차로 교구 선반을 쿵쿵거리며 찍고 다니는 행동이 최근 생겼다고 했다. 원장 선생님은 왜 그럴까 고민해 보니 산봉우리와 같이 놀 사람은 집에서도 누나와 여동생, 반친구들도 대부분 여자아이라서 함께 ‘남자아이의 놀이’를 할 대상이 없기 때문인 거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다시 적응해야겠지만 아이가 신나게 놀 수 있도록 남자 친구들이 많은 옆 반으로 옮겨보는 건 어떨지 제안하신 거다. 성별 가르기에 예민한 요즘 세상에 ‘남자아이들의 놀이’라니 아이가 집에서도 어린이집에서 당연히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놀기 심심한 순간 아이는 그 시간을 매일 어떻게 보냈을까. 원장님의 말을 들은 나는 생각하지도 못한 옆구리 공격을 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원장님께 변명처럼 “산봉우리는 혼자 어디서든 자동차를 잘 가지고 노는데요...?” 라고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원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머니, 자동차를 ‘부릉’하고 바닥에 굴리면서 혼자 노는 건 한계가 있어요. 누군가 같이 신나게 놀아야 놀이가 길어져요. 어린 산봉우리 혼자서는 그걸 못 하는 거예요. 놀이가 확장되고 길에 이어져야 충분히 놀아서 마음이 풀려요. 산봉우리는 그 마음을 해소되지 못하는 거 같아요.”
산봉우리에게 놀이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 아이들은 눈떠서 잠들 때까지 누구도 빠지지 않고 신나고 소란스럽게 놀았다. 남편도 시간이 날 때마다 몸으로 놀아주고 날씨가 좋으면 언제나 아이들과 놀이터로 혹은 킥보드를 타러 간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산봉우리는 집에서 진두지휘하는 누나들의 놀이를 따라 놀았고, 70년대생 시골 출신의 남편은 산봉우리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함께 놀아 본 적이 없다. 남편이 자란 시골에서는 온 자연 천지가 놀거리였기에 산봉우리가 좋아하는 자동차나 로봇으로 놀아주는 법을 모르는 거다.
집에 와서 답답한 마음에 남편에게 산봉우리와 좀 놀아주라 했다. 그러자 남편은 자기는 몸으로 노는 법밖에 모르는데 아이와 어떻게 놀아줘야 하는 건지 나에게 오히려 되물었다. 나 역시 집안일을 하고 막내를 돌보느라 ‘산봉우리’만의 놀이에 초점을 맞춘 적이 없었다.
어린이집을 다녀와서 남편이 퇴근하기 전까지 막내를 안고서 아이들을 챙기려면 산봉우리는 늘 뒷전이었다. 리모컨은 항상 누나들 차지에 TV는 시크릿 쥬쥬와 캐치 티니핑을 틀기 바빴다. 지겨워진 산봉우리가 놀아달라고 나에게 와도 받아주지 않았다. 막내를 안고 있는 나를 올라타거나 싸움 놀이를 하자고 긴 물건을 휘두르면 위험하니 하지 말라고 핀잔을 줬다 어린이집에서도 집에 와서도 이런 데 아이는 놀지 못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마음이 슬펐다.
오늘은 들판이에게 마지막 수유를 하고 남편에게 막내를 맡겼다. 산봉우리와 놀기로 마음먹었다. 평소면 잠자리에 들 시간이지만 나는 산봉우리에게 장난감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아이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게 아들과 놀이가 시작됐다. 우리는 도로 매트 위에 자동차 몇 개를 꺼내어 놓았다. 나는 도로 매트에 자동차를 굴리며 사고가 났다고 도와 달라는 상황극을 했고 아이는 빙글빙글 버스 타운 주차장에 차 종류를 바꿔가며 주차만 하고 있다. 나와 아들은 자기 말만 반복하며 각자 놀 뿐 우리의 놀이는 합쳐지지 않았다. 잠깐의 놀이 안에서도 침묵은 자주 찾아왔다. 산봉우리와 나는 눈이 마주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늘은 마음먹고 놀아주려 했는데 나도 산봉우리와 이렇게 놀아 본 적이 없어서 ‘남자아이의 놀이’에서는 무엇을 하며 놀아야 하는지 몰랐다. 혼자 놀던 산봉우리도 이랬겠구나 싶어서 또 눈이 시큰해졌다. 아! 나는 잠깐 멈추고 산봉우리가 나를 성가시게 했던 행동을 따라 했다.
“출발합니다. 부릉 부릉”
나는 산봉우리의 온몸에 자동차를 굴리며 부벼댔다. 내 손에 있는 자동차는 아이의 온몸을 지나 다락방인 장난감 방의 벽과 낮은 천장을 타고 돌아다녔다. 벽과 천장을 타고 요란스럽고 소란스럽게 자동차가 움직이는 순간 아이의 얼굴에는 웃음이 피어났다 아이는 신나서 나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거였구나! 까르르 웃음과 함께 재미가 가득 차오르는데 갑자기 산봉우리가 얼굴을 찡그리고 힘을 주며 기저귀에 용변을 보았다. 소변도 아니고 응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이게 먼저였다. 아빠한테 가서 기저귀를 갈고 오라니 지금 막 이렇게 재미있는데 절대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니야 아니야 똥 아니야.”
똥인데 똥이 아니라니...
“장난감 안 치우고 있을게. 얼른 기저귀 갈고 와.”
셋째로 태어나서 타고난 눈치가 백 단인 산봉우리, 다녀오면 이제 늦었으니 장난감을 정리하자고 말할 것이 뻔했나 보다. 평소 같으면 고집부리는 아이를 데리고 가서 기저귀를 갈아주겠지만 오늘은 나도 고집부리지 않고 한 발짝 물러나 기다리니 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보였다. 아이는 아직도 나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얼굴로 기저귀를 갈러 갔다.
잠시 후 새 기저귀를 차고 온 아들과의 다시 놀이를 시작했다. 우리가 북적이는 소리에 아직 자지 않고 1층에서 책을 읽던 첫째도 놀이에 합류했다. 자동차와 슈퍼윙스 친구들, 미니특공대까지 총출동하며 우리는 모두 신이 났다. 놀아주는 게 아닌 아이의 놀이에 온전히 집중하니 나도 재미있었다. 내가 이렇게 신나 보니 아이들이 왜 장난감을 하나씩 안 꺼내고 와르르 쏟아 버리는지, 정리하면서 놀자고 하면 들은 척도 안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의 놀이에서는 사고 난 자동차를 구하기 위해 견인차가 오고 온갖 만화 캐릭터가 등장하여 나서 모두의 힘으로 구조가 끝나며 놀이는 마무리되었다.
“얘들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정리할까?”
어린이집에서 산봉우리가 정리를 잘한다고 들었는데 집에서 정리는 언제나 누나들이나 엄마의 차지였다. 그러나 한 타임 신나게 놀고 난 아이는 장난감을 각각의 바구니 속에 정리하고 스스로 잠자리로 향했다. 모든 일은 기저귀를 갈고 난 후 단 10분 만이었다. 아이에게 집중한 온전한 10분으로 아들의 놀이에 대한 마음이 충족된 거다.
“산봉우리야, 내일도 엄마랑 신나게 놀아줘!!”
나의 말에 산봉우리가 신이 났다. 나의 마음도 차올랐다. 이것이 놀이의 힘인가 보다. 나는 비로소 놀이의 힘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