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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밍꼬 Oct 08. 2021

 들판이 탄생의 숨은 이야기

코로나 베이비와 함께한 행복 찾기


  우리 집 들판이는 코로나 베이비이다. 분만과 입원을 위해서는 48시간 내의 코로나 검사 결과가 있어야 했다. 자연스레 진통이 오기를 기다리며 나와 남편은 며칠 간격으로 두 번의 코로나 검사를 받았고 2021년 1월 어느 밤 마스크를 쓴 채 들판이를 만났다.


  들판이는 우리 집 넷째 아이이다. 원래는 남편의 의견이 9할로 세 명의 아이를 낳기로 했었다. 19년 셋째의 출산과 양육을 마지막이라 여기며 힘든 육아를 버텼고 그 아이가 돌 쯤이면 좀 나을 테니 그동안 가지 못한 해외여행이 가고 싶었다. 2020년 두 번의 황금연휴 기간에 각각의 여행을 계획하고 수개월 전부터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했다. 그러나 2019년 12월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찾아왔다. 중국에서 정체불명의 폐렴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새해가 되고서는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멈추었다.


해외여행은 꿈나라의 이야기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환불을 받고 나서야 안도의 숨은 나왔지만 여행에 부풀었던 마음은 바람 빠진 풍선이 되었다. 그런데 남편과 나의 아쉬움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향했다.


그쯤 두 살이 된 셋째가 너무 예뻤다. 첫째 둘째를 키울 때는 힘들어서 빨리 크기만 바랐는데 셋째는 크는 게 아쉬웠다. 이왕이면 아이들 짝을 맞추자는 생각이 들었고 여행도 못 가는데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됐다. 어디서 들은 넷째는 행복 그 자체라는 말에 내가 잠깐 홀렸다. 나는 또 입덧의 구덩이로 들어갔다. 네 번째 입덧도 역시 힘들었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코로나와 버티기 한 판이었다.

  누구에게나 힘든 코로나 시대를 임산부가 되어 세 명의 아이들과 보냈다. 코로나 시대는 많은 것이 달랐고 우리는 그 변화의 직격탄을 여러 번 맞았다.


우선 아이를 낳는 날까지 산부인과는 혼자 다녔다. 병원에는 보호자 한 명만 동행할 수 있어서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있거나 주말에 남편이 아이들을 볼 수 있을 때 다녀야 했다. 출산할 때도 혼자 아이를 낳으러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한 번씩 확진자가 폭발할 때면 아이들은 몇 주씩 어린이집에 가지 못했다. 한참 입덧이 심할 때, 만삭의 부른 몸으로, 몸조리도 못한 채 꼬물거리는 아이를 한 몸처럼 안고 2살, 5살, 7살 아이들을 챙겼다. 작은 입들을 먹이려고 열심히 밥을 했다. 먹고 돌아서면 밥을 해야 했으니 쌀은 줄고 나의 체력도 줄었다. 어린이집 긴급 보육이 있었지만 보낼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그냥 보내라, 임신한 몸으로 힘드니 어쩔 수 없다고 했지만 속도 모르는 소리였다. 한 명만 아파도 모두가 아플 테니 더 조심해야 했다.


  당연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자 그동안의 모든 것이 소중했다는 것을 알았다. 균형 있는 식사와 간식이 나오던 어린이집, 매일 볼 수 있던 친구들과 선생님. 언제든 나갈 수 있어서 미루던 집 앞 산책이 생각나서 그때의 게으름을 탓했다. 아이를 품은 몸으로 마스크를 쓴 채 헉헉거릴 땐 맨 얼굴로 마음껏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코로나 시대를 맞아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친구들과 가까이하면 안 되다고 말하는 엄마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일상의 보석들도 발견하였다. 코로나는 밖으로 도느라 놓치고 있던 소중한 순간들을 알려 주었다. 외출 없이 집에서 긴 시간을 보내도 형제 많은 집의 아이들은 함께 노느라 심심한 줄 몰랐다. 특히 그동안 부쩍 자란 첫째 솔방울을 보면 아이가 더 자라기 전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던 것이 지나고 보니 나에게 선물이 되었다. 외출이 줄고 그것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니 아이들은 아프지 않았고 아무 일 없는 평범한 일상이 행복이었다.


  그 사이 뱃속에 아이는 세상에 나올 만큼 자랐고 때가 되어 진통이 왔다. 다행히 한 시간 거리의 시부모님이 와주셨고 그 순간만큼은 아이들을 맡겨놓고 마음 편히 남편과 병원에 갈 수 있었다. 가장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 시작 후 2년, 일상을 멈추었지만 아이들은 자랐다. 뱃속의 넷째 들판이는 어느새 기어 다니며 언니 오빠를 따라다니고 챙김만 받던 셋째 산봉우리도 들판이만은 다정히 챙긴다. 깍쟁이 둘째 이파리는 친구들보다 작고 가벼워서 잘 넘어졌는데 마스크를 쓰고 지내는 동안 잘 먹고 잘 자서 한 뼘 크고 달리는데 선수가 되었다. 첫째 솔방울이는 입학을 하며 나를 학부모로 만들어 주었고 전면 등교를 하는 1학년의 특권을 누렸다. 아이는 하나 늘었지만 세 아이들은 자라나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겼고 나는 조금 덜 힘들어졌다. 그 안에서 변화를 느꼈고 희망을 만났다.  


  우리는 이제 코로나가 잠시의 방심 속에서 삽시간에 퍼진다는 것을 안다. 노력과 배려 안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면 좋겠다.


 언젠가 이 시간의 기억이 옅어져 갈 때 진짜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코로나 시대를 보내며 만난 가장 큰 행복은 우리 집 넷째 ‘들판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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