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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밍꼬 Nov 14. 2021

함께하는 맛, 우리의 비빔밥

그 시절 친구들과 함께하던 추억의 맛

금요일 오후, 수업이 끝나도 소녀들은 교실을 떠나지 않았다. 교실을 채우는 들뜬 공기는 소녀들이 곳곳에 모여 앉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콩나물하고 시금치는 들어가야지”

  “밥은 다 같이 싸오자.”

  “우리 집은 고추장이 맛있어 내가 챙겨 올게!”

  “후라이 후라이! 노오란 달걀 후라이 노른자는 익히지 말고!”    


  모여 있는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진지하다. 둥글게 모여 앉은 사이로 옆 모둠의 아이가 얼굴을 내밀며 묻는다.

   

“여기는 뭐 넣고 만들어?!”

“안 알려 주지~~ 비밀이거든~!!”    


  내일은 토요일.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날이다. 내가 14살. 토요일은 학교에 갔다. 토요일이 노는 날이 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학생은 학교에 가고 어른은 직장에 가고, 평일보다 일찍 끝나고 집에 와도 밥을 챙기려면 늦기 때문일까? 아이들과 교실에 남아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토요일은 특별하고 즐거웠다.     


“종례 끝! 비벼먹은 그릇은 씻어서 가사실에 갖다 놓고.”    


  아이들의 가방 속에 든 갖은 재료들은 아침부터 냄새를 풍기며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엉덩이를 들썩이고 집중 못하는 오른손은 벌써 비빔밥을 비비는 걸까? 담임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녀들은 재빠르게 가방에서 가져온 것들을 꺼냈다.  


  초록색 체크무늬 교복을 입은 소녀들은 하얀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 올리고 커다란 양푼에 가져온 밥을 툴툴 털어 넣는다. 이 집은 쌀밥, 저 집은 알알이 섞인 잡곡밥 모양도 맛도 다르다. 그 위로 준비해 온 여러 가지 재료들을 더한다. 점심에 먹을 것이 혹시나 상할까 아침에 갓 무친 콩나물, 시금치에는 토요일 아침까지 애쓴 엄마의 정성이 들어있다.


   일회용 그릇, 플라스틱 찬합, 보온 도시락 등 각자 방법으로 싸온 비빔밥 재료들이 양푼 위로 모여 앉는다.  솔솔 풍기는 고소하고 맛깔스러운 냄새 때문일까 늦은 종례로 이제야 집에 가는 옆 반 아이들이 창문 넘어 우리 반을 부러운 듯 쳐다본다.


  교실 비빔밥의 꽃은 캔 참치, ‘투둑’하고 뚜껑을 열어 넣고 마지막으로 고추장을 덜어 넣는다. 밥알과 재료들은 양푼 안에서 소녀들의 숟가락 손짓에 따라 잘그락이며 함께 비벼진다, 모두가 함께 준비한 재료는 윤기 있는 빨간 고추장 옷을 입고 춤을 춘다. 커다란 양푼 안에서는 누가 맛있고 맛없고 잘하고 못하고 없이 함께 어우러져 맛있게 된다.


  지켜보던 담임선생님은 완성된 비빔밥 옆에 오셔서 곳곳을 돌아가며 한 수저씩 맛을 보신다. 이제와 생각하면 토요일 종례 후 비빔밥까지 챙겨야 했던 선생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녀도 퇴근 시간을 기다린다는 걸 알아버렸을 때는 비빔밥의 추억은 깊이 묻혀서 여리하게 희미해졌다. 소녀들이 만든 비빔밥은 함께하는 즐거움이 만들어준 맛이었을까 모두 모여 만드니 맛이 없을 수 없는 맛이었을까?     


  그때는 비비고 웃고 먹기만 하면 되었는데 친구들과 종알대며 먹던 비빔밥은 어디 가고 또렷한 것 하나 없는 복잡한 내 속이 비빔밥이 되었다. 할 일만 늘어진 나의 평범한 매일도 평범한 재료로 만들었던 비빔밥처럼 함께 모아 섞으면 특별하고 맛있어질까?     


  비빔밥이 먹고 싶어졌다.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찾아본다. 쌓아놓고 쟁여먹던 때와 달라 냉장고에는 비빔밥에 넣을 남은 찬들이 없다. 눈에 보이는 자투리 채소들을 꺼내 썰어 기름을 둘러 달군 프라이팬에 볶아낸다. 길게 썬 쫄깃한 새송이 버섯, 총총 썬 당근채, 호박을 나박나박 썰어 채 썬 양파와 함께 볶다 새우젓을 살짝 넣고 마지막에는 들기름을 두른다.


  큰 대접에는 아침에 지은 따뜻한 밥을 담고 볶은 채소를 덜어낸 팬에는 기름을 더 둘러 달걀 두 개를 부쳐낸다. 지글지글 노오랗게 익은 달걀 후라이는 팬에서 미끄러지듯 대접으로 들어간다. 시댁에서 가져온 윤기 나는 달달한 고추장 반, 친정의 매콤 담백한 고추장 반 스푼을 섞어 넣으니 균형이 맞으며 기억 속 비빔밥 냄새가 올라온다. 마지막으로 고소한 참기름을 한 바퀴,

 그래도 무엇이 아쉬운 순간    


  “삐비 비빅--”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와 남편이 도착했다. 나와 비빔밥을 나눠 먹을 사람. 마주 보는 얼굴이 함박 해지면 두 개의 숟가락을 놓으니 드디어 비빔밥이 완성됐다. 서둘러 손을 씻고 앉은 다정한 사람이 커 다란 숟가락으로 맛깔나게 비벼 준다. 함께여야 더 맛있어지는 그 맛을 오늘은 우리 두 사람이 채운다.    


  그 맛을 함께한 그날의 소녀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의 비빔밥의 시간과 맛을 기억할까? 토요일 한 낮, 교실의 비빔밥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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