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인터넷 검색으로 거뭇한 호밀빵과 새하얀 둥근 빵이 무엇인지, 어디서 그 빵을 살 수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좋아하던 12살의 나는 검고 거친 빵이 무엇인지 몰랐다. 몰라도 알프스 산자락에서 염소 치즈와 그 빵을 먹고 싶었고 프랑크 프루트로 간 하이디가 보드라운 하얀 빵을 알프스 친구에게 주기 위해 옷장에 숨기던 그 마음을 함께 소중히 여겼다. 이 책에는 그런 마음이 담겨 있다.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는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김지현님이 어릴 적 읽은 소설에 등장한 음식을 매개로 쓴 산문집이다.
맛있는 음식만큼 경계를 풀어주고 마음을 여유롭게 해주는 것이 있을까? 음식을 통한 짧은 글은 읽는 부담은 덜고 즐거움은 더한다. 책 속 글들은 주제에 따라 빵과 스프, 주요리, 디저트 등으로 나뉘어 독자의 입맛을 돋운다. 취향과 기분에 따라 원하는 곳을 읽으면 된다. 곳곳에 예쁜 음식 그림은 보는 맛을 더한다.
40여 개의 글들은 다양한 역할로 독자를 이끈다. 소공녀와 작은 아씨들을 읽던 어린 소녀의 마음을 떠올리게 하고, 제목만 알고 읽은 척 지났던 소설을 읽고 싶게 한다. 전채요리처럼 독서욕을 돋운다. 나는 그 미끼에 걸려 거위구이 요리로 소개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읽었는데 요새 막장 드라마에 버금가는 스토리 흡입력에 빠져 버렸다.
특히 나에게 인상 깊던 부분은 소설에서 그때 그 음식을 먹어야만 했던 이유를 쓴 글인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햄과 그레이비,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옥수수팬 케이크가 그 주인공이다. 두 소설 모두 노예제도가 남아있던 미국 남부가 배경이다. 매력적인 초록색 눈과 화려한 드레스의 스칼렛 오하라가, 톰 소여의 어른 버전인 줄 오해하던 톰 아저씨가 시대 격변기에서 살아남은 삶이 어른이 된 나에게 진한 울림을 주었다. 어릴 적 책 속의 짧은 기억은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를 통하며 지금, 이야기와 세상과 나를 연결 짓고 확장시킨다.
이 책은 좋은 밀가루로 만든 맛있는 식빵 같다. 아는 맛이지만 계속 먹게 된다. 음식을 소재로 삼는 글의 기본 틀은 반복해도 크게 질리지 않는다. 작가는 음식 소개, 레시피, 소설의 배경, 명작을 공감하던 소녀 마음을 한 편의 글에 깔끔하고 어우러지게 담는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언어로 써낸 것을 보면 작가가 얼마나 깊은 애정으로 이 명작들을 읽고 읽었을지가 상상된다. 작가인 김지현님은 번역가로도 활동하지만 ‘아밀’이라는 필명의 SF 소설가라고 한다. 이런 작가의 책이라면 나에게 무관심 영역이던 SF 소설도 읽어보고 싶었다.
부제에 번역가가 쓴 번역 이야기라 쓰여 있지만 그 내용이 크지 않아 어떤 독자에게는 아쉬움 일 수 있다. 그러나 번역가라는 직업이 글자를 글자로 옮기는 사람이 아닌 번역을 통하여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전달하는 직업이라고 넓게 생각하면 음식을 통해 소설과 그 주변 이야기를 써낸 이 책은 나름의 번역가 역할이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하이디의 검은 빵을 빨간머리 앤의 나무딸기 주스를 기억하는 그대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책을 통해 어릴 적 방안에 쪼그려 앉아 책장을 넘기던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김지현(아밀),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비채,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