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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밍꼬 Jul 08. 2021

육아의 수용소에서

도망갈곳 없는 육아의 수용소에서 오늘도 버티며


  2019년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이었다. 토요일 아침마다 수련관으로 발레를 다니는 첫째를 데려다주고 기다리는데 옆에 있던 첫째의 친구 엄마가 소식을 전해 주었다.   

  

“중국 우한에서 정체불명의 집단 폐렴이 발생했다던데”    


  아는 게 없으니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중국 처음 듣는 도시에 발생한 폐렴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알아야 할 일인가 싶었다. 아이 친구의 엄마가 보건소에서 근무해서 질병에 관심이 많은가 보다 하였다. 그런데, 전 세계가 이렇게 될 줄을 몰랐다.    



  2020년이 되고 구정이 지날 쯤부터 코로나19는 우리에게 그 모습을 제대로 나타냈다. 전 세계에서 관련 뉴스가 매일 이어졌고 시신을 묻을 곳이 없다며 줄줄이 선 냉동 트럭에 시신을 보관하는 뉴욕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심각해질 줄 모르고 나는 이미 호기롭게 넷째를 품고 있었다. 몸도 힘들지만 겁이 났다. 세 아이를 한 두 달씩 몇 번을 반복하여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하였고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가끔 들리던 친정과 시댁도 겁이 나서 못 갔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아이들 삼시 세 끼를 챙기니 쌀통에 쌀은 푹푹 줄어들었고 나의 체력과 마음의 여유는 그것보다 더 빨리 바닥이 났다. 일하는 엄마가 아니라서 아이들을 내 품에서 챙길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그런 짧은 위안 뒤에는 말 좀 들으라고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는 내가 있었다. 그러던 중 나의 머릿속에는 한 권의 책이 떠올랐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 책은 심리치료 중 의미 치료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의 저서로 여러 곳의 나치 수용소를 거치며 살아남은 이야기를  책이다. 추위와 공포에 벌거벗은 몸만 남은 수용소에서조차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는 나의 선택과 의지이고 개인의 정신적 자유는 빼앗을 수 없다는 그런 내용이다.     


  코로나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 같은 가정보육에서 나의 신체적 정신적 노동력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아이들에게 쏟아야 했던 상황이 마치 수용소에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심한 입덧과 임신 중인 무거운 몸으로 말이다. 아이들을 돌보며 넷째를 고 있는 내내 이 책을 마음에 두출산으로 하고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오랜 시간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다시 펼쳤다. 10년 전 대학원 수업을 위해 꾸역꾸역 읽고 훈장처럼 두었던 책은 책장 속에서 누렇게 변해 있었다.    


  20대 중반,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1부 수용소 이야기는  SF소설보다 비현실적이었다. 그 이야기들이 처절하여 실감 나지 않았다. 2부 의미 치료의 이론은 삶이란 나의 의지이며 선택이라니 좋은 말인 것 같은데 종교생활과 거리가 있는 내가 성경책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당장 수용소에 갇혀 춥고 배고프고 언제 가스실로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슨 인간의 존엄이며 자유의지란 말인가?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고 로고테라피를 창시하여 유명한 심리학자가 된 프랭클 박사가 나와1는 다른 “운도 좋고 특별하고 똑똑한 사람"이기에 가능할 일 같았다. 물론 책을 읽고 시험 봐야 했던 수업 시간에는 그렇게 쓰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10년 만에 다시 읽은 책은 달랐다. 수용소에 도착하여 모두가 털 한 톨 없이 벗겨지고 나는 구분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다. 5분 뒤에는 가스실로 보내지는지 살아남는지 알 수 없다. 이름을 부를 필요 없는 수용소에서 ‘나’라는 존재는 없이 수감번호로 불려지고 추위와 노동이 계속되는 수용소 생활이 인간을 얼마나 깊은 나락으로 빠지게 했을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면을 유지하려 했다니 말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가. 10년 동안 책이 그대로인 것이 분명한데 다르게 느껴지다니, 변한 것 나인가 보다.


  내 책장에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읽히지 않고 있던 10년 동안, 나는 대학원을 졸업을 하고 약간의 사회생활을 하다 결혼과 육아를 하며 '애만 키우고 밥만 하며' 지냈다. 전에는 채찍질하듯  바쁘고 성과를 내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집에 있는 나'에 대해 느껴지는 슬픈 마음과 현실의 괴리감은 컸다.


남편은 나를 보며  내가 집에 있어서 아이들이 건강하고 예쁘게 자란다는 교과서 같은 말을 하였지만 그 말은 [죽음의 수용소]를 처음 읽었던 20대의 나처럼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내 속도 모르고 하는 말로 들렸다.     


   등원하는 아이들과 출근하는 신랑은 챙기고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오고 신랑이 퇴근하길 기다리며 아이들이 빨리 잠들기 바라는 생활만 8년이었다. 노동의 양이 줄어들기는커녕 챙겨야 할 아이들은 하나씩 늘어났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나는 누구인가 싶었고 그저 '누구 엄마'로 불리어지는 건 ‘나’라는 존재가 없는 수감번호 같았다.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했고 노력과 비용도 꽤나 들였다. 결혼과 육아로 나의 기회가 박탈되었다고 말하였지만 복잡한 사회생활로부터 피신할 수 있었기도 하다. 그러나 스스로 집에 있는 사람이라 드는 생각은 나를 너무 작게 만들었다.      


  그래도 10년 만에 같은 책이 다른 마음으로 읽히는 것을 보면 ‘수감번호의 삶’이 허투루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 자리에 멈춰 있었던 것 같은데  가만히 그 자리에서 앉아 숙성된 것 같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말하는 인간의 의지와 삶의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조금 알게 된 것을 보면 그동안 잘 견디었다고 애쓴 나를 토닥인다.    

  



  넷째를 낳았다고 하면 대단하다 애국자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런 말에 나는 에둘러 웃기만 한다. 지나고 보니 그 과정은 특별하고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힘들고 할 일이 많았지만 하나하나 낳고 키우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남편과 네 아이와 함께하는 살림과 육아 삶에서 또 하루를 지내다 보며 아는가? 나도 육아의 에서 이름난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아마 프랭클 박사님도 수용소에서 자신이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런 삶의 태도를 유지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이 순간에 최선이라 생각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그 하루들이 모여  내가 다.


  잠깐 뒤돌아 내 생각에 빠져있으면 소리치는 아이들의 외침에 답하고 서로 자기들이 먼저라고 싸우는 아이들을 말리는 것이 나의 현실이지만 충실하게 하루를 살고 오늘도 묵묵히 버틴다. 육아의 수용소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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