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여행’ 이었다. 2015년 1월 겨울방학에 생애 첫 여행을 영국으로 떠났다. 매형이 주재원으로 영국에 계셨기에 누나가 예전부터 방학 때 영국에 놀러 오라고 노래를 불렀다.
누나의 목적은 내가 더 넓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고 느끼라는 것보다는 조카를 같이 돌보고 집안일도 어느 정도 분담해주길 바랐던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보다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한 달 이상 숙박비를 내지 않고 지낼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누나의 어떤 목적이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주 감사히 말이다. 심지어 ‘호식이 두 마리 치킨’이 식더라도 꼭 챙겨 오라 하였고 순순히 간장 치킨을 공수해 갔었으니...
큰 캐리어 두 개와 가방까지 메고 갔던 나로서 수상한 사람으로 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입국심사는 무사히 마치고 짐을 모두 들고나가는데 경찰이 다가와 나를 불러 세워 이것저것 물어봤었다. ‘누나가 뉴 몰든에 살아요’ 이 한마디에 쿨하게 보내줬지만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봐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처음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짐을 갖고 나갔을 때 ‘외제차가 정말 많아서 신기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외국이니깐 당연히 외제차가 많은 것인데 첫 해외여행이어서 그런지 당연한 것이 나한테는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영국의 첫 느낌이다.
‘차선이 우리와 반대로 좌측 방향이 진행 방향인 것(차 핸들은 우측)‘, ’콘센트가 다른 것‘ 등 한국과 다른 것들이 많았고 이는 신선하면서도 재밌었다. 나는 원래 있던 환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비교하곤 했다. 좋은 의미에서 비교 말이다. 건축물들도 한국과는 달라서 더 관심이 갔고 이는 곧 그림을 그리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영국에서 생활은 주로 오전에 조카와 놀아주고 아침 겸 점심을 든든히 채운 뒤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뉴 몰든(근교)에서 워털루(런던) 역까지 기차 타고 약 20분 정도 걸렸고 워털루 역에서부터 영국 탐방은 시작되었다. 런던 시내는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돌아볼 수 있으므로 주로 두 다리를 이용해 걸었다. 영국에 오래 머물 것이기에 관광에 급할 것이 없었고 하루 한곳만 보더라도 아쉬움 없이 느긋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살면서 그 어느 여유들 보다 여유로웠다.
대영박물관, 내셔널갤러리, 코벤트 가든, 피커딜리 서커스, 타워브릿지, 빅벤, 런던아이, 세인트폴 대성당, 버킹엄 궁전 등 영국의 주요 랜드마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사진 찍어 간직했다. 영국의 모든 것이 신비로웠고, 외국 영화에서만 볼 수 있던 건축물들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중에서도 빅벤, 타워브릿지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밤에 집으로 돌아와 찍은 사진으로 일기 쓰는 노트에 그리기 시작했다.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로 말이다.
갑자기 왜 그렸는지 모르겠다, 중학생 시절까지 미술학원, 미술과외를 했지만 이후 10년 정도 손을 놨었기 때문에 잘 그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냥 그렸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그린다는 것이 중요했기에. 하지만 처음 그렸을 때는 너무 대충 해서였을까 별로였다.
당시 그림을 꾸준히 그리진 않았지만 가끔 그리고 싶은 것들이 생기면 모두들 잘 때 홀로 부엌 식탁에 앉아 그리곤 했다. 일기 노트에 담긴 그림들 중 제일 심혈을 기울였던 그림은 파란색 펜으로 그린 ‘타워브릿지’이다. 명암이 하나도 맞지 않지만 나름의 정교함이 있고 그리고 누가 봐도 ‘타워브릿지‘였다. 그때 그림의 매력을 느낀 것이 아닐까 싶다. 다 그리고 누나한테 보여주면 칭찬해줘서 기분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나 스스로 그림을 완성했다는 것에 대한 대견함과 나름의 느낌이 있어 오는 뿌듯함이 가장 큰 그림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즉, 자기만족이었다.
그림을 완성하고 다시 내 그림을 볼 때면 기분이 좋았다. 어떠한 일을 시작하고 끝낸 것에 대한 성취감도 어느 정도 있었고 내가 그렸다는 게 신기했다. 영국 여행을 하면서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게 시작되었고 새로운 여행지에서 나만의 추억을 간직하고자 사진을 담아와 카페나 음식점에서 그리고 다시 찍었던 배경과 나의 그림을 함께 사진으로 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