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을 갈 때면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도 쓸 수 있는 통합 유심칩을 '미리' 산다. '혹시나'파에 속하는 나로서는 안전성을 위해 많은 데이터를 선택한다. 휴가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약 일주일 정도밖에 머물지 못하지만 유심칩은 2주 혹은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고 데이터는 10GB 이상되는 것으로 샀다. 항상 넉넉한 게 부족한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인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데이터를 많이 쓰게 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도 있다.
2018년 11월, 아버지와 함께 로마로 떠났다. 당연히 유럽 유심칩은 두 개 준비했고 사용 시작일도 로마 현지시각보다 하루 전으로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나름대로 철저했다.
비행기를 타고 로마의 공항에 도착한 뒤, 공항의 와이파이를 켜자 이탈리아에 살고 있던 중학교 때 친구가 마침 공항 근처라 숙소까지 태워준다는 메시지가 와있었다. 그렇게 운 좋고 편안하게 숙소까지 도착했다.
친구 덕에 무사히 숙소에 도착하고 짐을 정리한 뒤에 유심칩을 바꾸었다. 그러나 예상치도 못하게 전원을 여러 번 껐다 켜도 연결되지 않았다. 그때가 저녁 8시쯤 늦은 때여서 다음날은 되겠지라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러면서도 불안했다. 다음날 유심칩 연결이 안 되면 어떡하지. 당장 다음날 아침부터 콜로세움, 판테온, 트레비 분수도 봐야 하는데 인터넷이 되지 않으면 길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해외여행에서 구글맵만큼 든든한 것이 없다 보니 인터넷은 필수였다.
최악의 상황은 다음날도 유심칩 연결이 안 되는 것이었고, 이를 대비하기 위해 숙소에서 와이파이를 잡아 해결책을 모색했다. 여행 시 최우선으로 하는 '가이드 북'은 미리 준비했고 중요한 건 지도였는데 이리저리 알아보니 인터넷이 안될 경우에도 구글맵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바로 '오프라인 지도 다운로드'. 그렇게 다니려고 하는 위치에 지도를 오프라인으로 받아놨다.
잠들기 전에 마음을 다스리며 곧 만나게 될 판테온을 그려나갔다.
로마 숙소에서의 드로잉 (2018. 11)
다음날 조식을 먹고 나가기 전에도 유심칩과의 사투를 벌였지만 끝내 응답하지 않았고, 차선책이었던 오프라인 구글맵을 믿기로 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길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길의 방향 익히고 나섰다.
내가 그렇게 믿었던 구글맵 오프라인 지도는 처음에 잘 가다가 내 위치를 잡아주지 못했다. 눈앞이 캄캄하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구나 했다. 내가 사용할 줄을 몰라서였을 수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구글맵은 볼 수 있어도 내가 있는 위치를 찍어주지 못해 큰 의미는 없게 되었다. 이 모든 게 다 유심칩이 안돼서다. 유심칩 하나가 이렇게 여행에 큰 영향을 끼칠 줄이야.
대략적으로 길을 익혔기 때문에 콜로세움까지는 무난하게 갈 수 있었고 그 웅장함에 매료되었다.
로마 여행 전에 그려본 콜로세움 ( 2018. 10 )
오프라인 지도와, 로마 내 길에서의 표지판, 가이드북 이렇게 삼총사가 함께해 계획했던 곳들을 다 둘러볼 수 있었다. 전날 그렸던 판테온도 마주했다. 주위에는 팔찌를 팔던 현지인들이 있었고 이중 한 명이 내 신발이 멋있다면서 자연스럽게 다가오며 말 걸려고 했다. 느낌에 딱 팔찌를 강매할 것 같아서 "땡큐" 하고 피했다. 조금 무서웠다.
로마의 판테온 ( 2018. 11 )
그날 계획했던 일정들은 인터넷 없이도 소화했다. 이탈리아의 정통 까르보나라와 피자도 먹었으니 말 다했다. 상황이 참 웃기다 못해 아이러니했던 것이 여행 일정을 끝내고 숙소에 돌아온 뒤, 그제야 유심칩이 제대로 작동하고 연결되었다는 문자들이 잇달아 왔다. 정말 다행이었지만 속상하긴 했다. 이럴 거면 진작 되지 그랬어.
해외여행에서 유심칩이 이렇게 소중한지 하루만이었지만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없었다면 없는 대로 그 나름의 방법을 찾아나가면 되지만, 있다가 없게 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여행에서도 그렇지만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일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또 생각한 대로 안되기도 일쑤다. 그런데 신기한 게 어떻게든 시간은 지나가고 해결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
판테온 드로잉을 보니 다시 또 여행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