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한 형이 나에게 드로잉 연필과 지우개 선물을 해줬다. 그림 그리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더 인상이 깊었던 것은 연필에 내 이름에 포함된 'YONG'이라는 글자를 새겨주었다는 것이다. 보통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하단부에 'YONG'을 새겨놓는데 그것을 잘 기억해서 각인해줬다.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해주는 선물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선물 받은 연필과 지우개
'YONG'이 각인된 연필
연필 선물을 받고 한동안은 가방에 그대로 둔 채 방치했었다. 일로 정신이 없어 바쁘다는 핑계, 주말에는 글을 써야 한다는 핑계, 밀린 잠을 자야 한다는 핑계, 친구들을 만나야 하는 핑계로 말이다. 연필 깎기 아까웠던 것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 자체의 연필이 너무 귀엽기도 하고 각인된 것을 쭉 간직하고 싶어서다. 친근한 동물로 장식된 케이크가 너무나도 귀여운 나머지 선뜻 칼을 갖다 대기 힘든 것처럼.
케이크도 결국 음식이니 먹어야 하듯, 연필도 결국 써야 했기에 칼로 연필을 뾰족하게 깎았다.
보통 연필로 밑그림을 많이 하기 때문에 연필만으로 그림을 완성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가볍게 스케치한 뒤에 펜으로 그리고 흔적을 지우개로 지우거나, 수채화를 해서 연필의 흔적을 덮거나 아니면 그냥 약하게 남겨두거나 한다. 최종적으로 연필은 그림의 방향을 나타내고 펜과 수채화에게 공을 돌린다. 자신은 묵묵히 제 역할을 할 뿐 나서서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연필을 드로잉의'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하고 싶었다. 시작과 끝을 연필로.
런던 거리 연필 드로잉 과정 (2020. 10)
연필은 어렸을 때 많이 써봤기 때문에 누구나 익숙하고 친근할 것이다. 우리가 학생일 때 받아쓰기하고 일기를 쓰고 공부할 때 썼던 연필. 6각으로 각져있거나 아예 둥근 원기둥 형태의 연필에서부터 겉에는 캐릭터로 입혀진 연필까지 종류와 진하기 정도도 모두 다르다. 그래도 지우개와 단짝이라는 것과 누르는 강도에 따라 약하게 혹은 진하게 써진다는 공통점은 있다.
어린 시절 미술학원을 다녔다면 검은색 4B 연필과 잠자리가 그려진 주황색 종이 곽의 톰보우 지우개가 연관검색어처럼 떠오를 것이다. 이번 그림을 그리면서도 '연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사용했던 기억과 추억들을 떠올려 보곤 했다.
미술에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일반 사무용으로 사용하는 연필과 미술용 연필과의 차이는 잘 모르지만 플라세보 효과와 같이 '미술용'이라는 말 자체로도 더 잘 그려지는 듯했다. 약하게 힘을 줘서 스케치하듯 구도를 잡아가며 선명한 부분은 강하게 힘을 주며 그려 나갔다.
보통 세밀하게 표현할 때 펜을 사용해서 못 느꼈었는데, 연필을 사용하다 보니 연필심 자체에 울퉁불퉁함이랄까 뭔가 거친 부분도 담은 느낌이 들었다. 펜의 경우 각자의 심 굵기의 규격이 정해져 있어서 잉크가 부족해져 나오는 강약의 차이와 펜 촉이 무뎌져 더 굵게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연필의 경우, 깎는 정도에 따라 연필심의 굵기를 조절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필심 내에서 거침의 정도 차이가 미세하게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학창 시절 청소 시간에 밀대 걸레로 바닥을 닦는데, 운동장에서 묻혀온 작은 모래 혹은 돌멩이들과 함께 밀리면서 바닥이 쉽게 닦이지 않는 느낌, 긁는 느낌이랄까. 불순물로 인해 거칠어지는 느낌이 연필로 그리면서 느껴졌다. 그런데 그 느낌이 재밌었고 신선했다.
연필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생각해본 적이 없던 터라 이번에는 연필로만 그림을 그리며 연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볼 기회가 있었다. 이런저런 다른 고민과 생각들과 함께. 그렇게 '조연'으로의 연필이 충분히 '주연'으로서의 매력이 넘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