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버지와 함께 밀양의 재약산에 다녀왔다. 표충사에서 시작해 산을 오르는 것이었고 오랜만에 등산이라 재약산 정상보다는 아래에 있는 사자평을 목표로 올랐다. 그곳에 가면 예쁜 억새꽃들을 볼 수 있다는 얘기에 부푼 마음을 가졌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오랜만에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죄송한 마음이 커서 산에 가자고 하시는 말에 날부터 잡았다. 출발하기 전날, 등산에 필요한 짐을 두 가방에 모두 싸셨다. 준비성이 얼마나 철저하신지 혹시나 모를 배고픔과 당떨어짐을 이겨내고 수분 보충을 위해 빵, 초콜릿, 이온음료, 물등의 식량은 기본이었다. 그리고 몸을 생각하여 얇게 걸칠 수 있는 옷, 손수건, 선크림, 물파스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셨다. 블랙야크에서 '100대 명산'을 모두 마친 아버지의 내공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날씨는 흐렸다. 그래서 선크림을 바르지 않았어도 됐었는데라는 생각과 그래도 나중에 해가 쨍쨍하게 비출지도 모르니 잘 발랐다는 생각이 서로 다퉜다. 그런데 자외선은 해가 비추지 않아도 있기 때문에 선크림 바르길 잘했다는 게 결론이다.
오전 9시경부터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시원했기에 큰 어려움 없이 올랐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중간중간 사진 찍기 삼매경이었다. 같은 꽃인데 보이는 것마다 찍으시는 모습을 보고는 '굳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사진 찍는 것 자체가 채집하는 것처럼 보여 아버지지만 귀여우셨다.
충분히 쉬면서 올랐는데, 햇빛 한번 강하게 비추지 않아서 주변 풍경들이 살아있는 느낌이 들진 않아 아쉬웠다. 사자평에 가서 억새꽃들을 둘러봤는데, 날씨 탓인지 힘이 없어 보였다. 억새꽃의 줄기들은 약간의 보랏빛을 띠어 이런 표현이 적당할지 모르지만 아파 보였다. 살짝은 허탈한 마음이 가시지 않은 채 둘러봤다.
밀양의 재약산 '사자평'
천천히 둘러보는 중에 날이 거짓말처럼 나아지기 시작했다. 흐린 구름들은 저 멀리 떠나고 있고 항상 그 자리에 있던 태양이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아니 한두 시간 만에 날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단 말인가. 사자평 고산습지는 580000㎡로국내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는 곳이어서 어느 정도 둘러보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카메라를 가방에서 꺼내 풍경을 담느라 시간을 많이 보낸 것도 한몫했다.
밀양의 재약산 '사자평'
흐린 풍경만 사진으로 담고 내려가려고 했지만 날씨가 다시 맑아진 탓에 아버지는 다시 가방의 카메라를 꺼내서 사진 찍으러 다니셨다. 나도 나름대로 사진 찍고 이정표가 있는 쪽에서 서서 기다렸다.
사자평과 재약산 정상으로 나뉘는 길목이라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있었는데, 30대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지나가면서 하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분들은 다시 내려가는 것이었고 동일한 코스로 내려가는 것은 별로다 라는 식으로 얘기했다. " 내려갈 때는 또 다른 길로 가야지 같은 길로만 가는 것은 낭비야." 마치 산에 오르고 다른 길로 내려가는 것에 우월감을 갖고 말하는 어투로 들려 마냥 듣기 좋진 않았다.
왜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낭비고 잘못된 것일까.
가만히 서서 기다리다 그 대화 내용들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서 업무 특성(직업병?)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박할 말들을 머릿속에 정렬하기 시작했다.
우선 나는 공부를 하거나 배울 때 한 번에 끝내 본 적이 없다. 대학교에 와서 시험을 칠 때도 그렇고 '복습'은 필수다. 어학 점수를 위해 토익 시험을 칠 때에도 모의고사를 풀 때면 다른 종이에 문제 답을 체크하고 채점한 뒤, 틀린 것들을 다시 본다. 그 이후에 다시 동일하게 시험을 쳐보고 두 번 모두 틀렸다면 그 부분은 내가 아직 이해가 안 된 부분이니 공부를 더한다. 심지어 입사를 위한 인적성 공부할 때도 그랬었다. "등산은 시험이나 공부가 아니잖아요"라고 한다면 "공부가 아닐 이유는 또 무엇인가요?"라고 되묻겠지만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닌 듯하다.
사람은 모두 다르기에 정답은 없다. 서로를 이해해할 뿐.
사자평에서 날씨가 급변함을 보면서 느꼈던 것이지만 같은 산의 풍경이라도 날씨에 따라 분위기가 크게 달라질 수 있구나 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더욱 신기했던 것은 하산하면서 왔던 길로 내려갔는데 하늘이 맑아서 또 다르게 새로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올라올 때 보지 못했던 부분도 다시 볼 수 있었다. 같은 길을 되돌아온다는 것은 나아갔던 길에서 보거나 느끼지 못했던 것을 다시 담을 수 있기에 이 또한 의미가 깊다.
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도 그 나름의 의미는 충분하다. 주어진 시간 내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고 이는 다양한 경험을 제공해줄 수 있다. 나는 다만 한번 느꼈던 것을 다시금 되돌아보고 싶고 더욱 간직하고 싶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