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숙소에서
제주도 여행을 가기 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숙소'였다.
힐링 여행을 할 수 있을 때 좋은 숙소 얻는 것이 후회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출 사항을 고려해야 했기에 나름대로 타협점을 잡고 저렴하지도 비싸지도 않은 합리적인 가격의 숙소를 물색해나갔다. 숙소를 검색하다 확 꽂히지 않았던 경우가 많아서 두고두고 보다가 최종 결정에 이르렀다.
호텔에서 묵는 것도 좋지만 현지 느낌이 조금 묻어난 아늑하고도 쾌적한 숙소를 원했고 무엇보다 눈 뜨면 바다가 훤히 보여 속이 뻥 뚫렸으면 했다. 에어비앤비 광고 캠페인에 나온 슬로건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를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본사에서는 <Live there. Even if it's just for a night.>인데 한국에서 짧고 강렬하게 의역을 잘한 듯하다. 물론 누가 사는 집을 잠시 빌려 머문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느낌이 있는 숙소를 구했다. 그렇게 성산일출봉에서 가까운 숙소에서 3박 4일 동안 머물게 된다.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측에는 바로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고, 세면대는 문 옆에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숙소 입구 문에서 쭉 들어가면 책들이 오밀조밀 꼽혀 있고 그 아래 그림 그리거나 글을 쓸 수 있을 만한 작은 책상과 의자가 자리했다. 책상 바로 옆 확 트인 창문 너머로 성산일출봉이 아련하게 보이는 풍경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복층이라 위에는 널찍한 침대가 놓여있어 아늑함이 물씬했다. 머릿속에 원했던 사항 하나하나 모두 충족시켜주는 숙소였다.
제일 좋았던 것은 큰 창문으로 보이는 성산일출봉 그리고 바다 풍경이다.
아침에 일어나 창가로 가서 바깥 풍경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울까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한동안 멍하니 바라만 봐도 힐링될 것이라 확신했다. 창문을 열고 시원하고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바다 풍경을 보면 얼마나 좋을까. 성산일출봉도 그대로 있고 가까이에 있었던 식산봉(바오름), 앞의 파란 바다 모두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날씨에 따라, 새벽에서부터 해가 질 때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이 항상 새로워서 반하고 말았다.
숙소에서 오래 머물 수 있다 보니 창가에 앉아서 풍경을 천천히, 찬찬히 펜으로 그려보고 싶어 졌다. 풍경을 보니 그리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숙소에서의 추억을 그림으로 남긴다면 나중에 그림을 봤을 때 그때 그 순간이 떠오를 것이라 생각 들었다. 11월이지만 바람이 쌀쌀할 때도 있다 보니 바깥에 나가서 앉아 쭉 그리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숙소 내부에서 의자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며 그릴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주로 건물이 있는 풍경을 그리는 나에게 자연만을 그린다는 것은 큰 도전이었다. 펜 하나로 섬을 그려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최대한 우거진 숲들, 나무 하나하나를 표현하려 했다. 연필로 밑그림 하면서도 풍경을 잘 그려낼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 그렸던 기억이 난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처럼 '그림은 그려보는 거야'라는 마음가짐으로 조금씩 조금씩 그려나갔다. 가까이에 있는 흔들리는 억새들도 차분히 담아보고 둥둥 떠다니며 있는 오리들도 채워나갔다. 펜이기 이전에 검은색 하나로 명암과 원근감까지 표현해 나가는 것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하루의 반나절 정도 집중하다 보니 완성에 이르렀다.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지만. 앞으로 자꾸 그려나가면 표현하는 법이 달라지고 풍부해져서 더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보통 여행지를 가서 마음에 드는 풍경을 한없이 바라보는 시간은 30분이 채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다양한 풍경들을 눈에 담아야 하고 또 다른 일정이 있어서 오래 머물기 힘들다. 나 역시 그렇다. 이번에는 그림을 그리면서 풍경을 담아야 한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그 어느 때보다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나의 추억 한구석에도 차곡히 풍경을 기록해뒀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오래 바라보고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