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시돌목장에서 양과 말들을 보고 금오름에 들렀다가 숙소로 갈지 아니면 바로 갈지 고민하던 찰나였다.
그런데 날이 너무 추운 나머지 차에 앉아 내면의 두 자아가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11월의 중순이 넘어가고 20일 대로 접어들면서 추위가 한껏 강해졌음이 느껴진 터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씨를 느끼는 것에 이분법적 논리 접근이 힘들다지만 이번엔 적용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며칠간 제주에서 나름 오래 머물러서인지 너무 확연하게 차이 났다. 전날은 따스했고 당일은 추웠다. 몹시.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마라, 말할까 말까 할 때는 말하지 마라,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지 마라, 줄까 말까 할 때는 줘라,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는 명언에 의거하여 치열한 논쟁 끝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가면서도 나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멀지 않으니 언제든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금오름에 다다르니 주차장은 거의 꽉 차 있었고 올라가는 길 한쪽에는 차들이 모두 주차되어 있었다. 덕분에 나가는 차와 들어오려는 차가 마주치는 경우모두 버벅댔다. 주차를 끝내고 안 춥다 안 춥다 오르다 보면 땀나니깐 괜찮다를 수없이 되뇌고 차문을 열었다.
'그래도 춥다..'
추웠다. 게다가 주위에서 한번 가보면 좋을 거다라는 말만 듣고 와본 터라 사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오름에 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도. 보통 누가 무엇을 권하면 직접 겪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추천하는지, 반대인 경우는 왜 그런지 스스로 경험해서 비교해본다. 지인들의 SNS에 한 번쯤은 있던 금오름 풍경만 보고 짐작만 했을 뿐. 직접 금오름을 보고 나는 어떤 느낌을 받을지 알고 싶었다.
후드티 모자를 써서 추위에 약한 귀를 이불 덮는 것 마냥 감싸고 양손은 코트 주머니 속에 콕 찔러 넣고 오르기 시작했다.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20분 정도 가니 다 올라왔다. 순간 앞에 펼쳐진 풍경은 움푹 파여있었고, 푸딩 중간을 숟가락으로 떠먹고 남은 듯한 모습이었다. 아주 고르게 잘 푼듯한 느낌이랄까.
올라가니 자연스레 체온 상승이 되어 땀도 흘리고몸도 따뜻해졌다. 바람은 처음엔매섭게차갑기만 하더니 끝내 오르고 나니 시원했다. 같은 바람이라도 몸의 변화로 이렇게 달라질 줄이야. 다시 한번 나의 상황에 따라 같은 것이라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몸소 체험했다.
위에서 주변 풍경들을 둘러보고 난 뒤, 움푹 파인 곳으로 내려갔다. 억새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그 와중에 말도 있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사진을 함께 찍는 모습도 보였다. 나도 말 보러 가야지 하며 조심스레 발을 내딛으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금오름에서 만난 말 스케치
멀리서 바라봤던 말이 뛰어다니지 않아 묶여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역시나 목에 줄이 걸려있었다. 분명히혼자 외로울 거다 라는 생각과 함께 줄에 묶여 자유롭게 뛰어다니지 못하니 답답하겠구나 싶었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말을 바라봤는데, 말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억새풀을 쉼 없이 맛있게 뜯어먹고 있었다. 마치 나에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라고 하는 듯이. 그렇게 한참 말을 보고 있다가 한 커플이 말과 사진을 찍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여자분이 한 마디했다.
"주변에 먹을 것 천지라서 좋겠다. 말은."
말을 그토록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표현에 잠깐 뇌 회로가정지했다. 어떻게 참신한 생각을 한 걸까 감탄하는데 문득 생각한 사람, 느낀 사람의 마음이 대변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헬로키티를 보면 균형 잡힌 양쪽 눈에 코가 끝이다. 입모양도 없기 때문에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여 행복한 모습 혹은 약간은 우울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는 사람의 마음이 투영된 것이라 느껴졌다.
금오름의 말 드로잉 과정
금오름에 혼자 왔기 때문에 느껴진 나도 몰랐던 외로움,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말을 바라봤을 때 그 부분에 맞춰서 생각하게 된 듯하다. 그렇다면 주변에 먹을 것 천지라고 부러워했던 그분은 어떤 마음이 었을까.
4시가 다되어가는 상황에 배고픔이 밀려와 문득 들었던 생각이 었을까. 평소 요리에 관심이 많아집냉장고에 가득한 재료들이 떠올라 들었던 생각이 었을까. 다이어트로 음식 조절하느라 마음껏 편하게 먹지 못해서 들었던 부러운 생각이 었을까. 아니면 말이 억새풀을 먹는 모습과 주위에 많은 억새풀이 보여 보이는 그대로 들었던 생각일까.
다시 그 말을 되새겨 보니 아주 다양한 보기들이 존재했다. 그분은 어떠한 마음이었을지 추정만 해 볼 뿐이다. 그래도 한 가지는 깨닫게 되었는데 '무언가의 현상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은 나의 상태나 마음가짐,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예전에한친구와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영화 '라라랜드'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다. 나는 개봉하고 영화관에서 봤을 때두 주인공의 사랑이 결국 이뤄지지 않았으니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친구는 "그래도 결국 두 사람이 모두바랐던 꿈들을 이뤄냈으니 해피엔딩이라고 봐."라고 말했는데 그 말도 적잖이 충격이었다. 왜 난 그렇게 생각을 못했을까.
그렇게 생각의 관점이 다를 수 있구나 느끼며 최근에 다시 한번 라라랜드를 봤다.
마지막 남자 주인공의 재즈바에우연히 오게 된여자 주인공, 둘만의 추억이 담긴 연주를 듣고 돌아가다 다시 되돌아봤을 때두 사람에게 오가는 눈빛과 끝의 그 미소는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