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회사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집에 쌓인 짐들을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오늘이다 싶어 유유히 집에 와서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책상이 두 개인데, 한 책상의 반은 옷가지들이 쌓여 옷걸이가 되어 버렸고, 반은 필기구나 다른 짐들이 올려져 있었다. 그 책상 밑에는 택배 온 뒤에 정리하지 못했던 빈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렇다. 짐이 많다. 이내 곧 깨닫는 사실은 '버리지 않으면 똑같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꽤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집을 깨끗하게 보이기 위해 정리하여 다른 곳곳에 분산해서 넣어두면 정말 잘 치운 것처럼 느껴지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질량 보존의 법칙을 다시금 느낄 수 있다. 결국 똑같다는 말이다. 조금만 지나면 다시 쌓여있음을 목격할 것이 틀림없다.
이번은 큰 마음먹고 정리보다 버리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집을 깨끗하게 치우고 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버림'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다. 어렸을 때 책장에 꽂혀있던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이라는 책이 떠오르는데 뜨끔하다. 물론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 책을 읽은 것도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깔끔하게 살기 위해서 '버림'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건네준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다.
택배 받은 상자들은 종이 모으는 통으로 사용하고 큰 비닐봉지를 문고리에 걸어둔다. 마지막, 일반 쓰레기봉투를 방안에 뒀다. 그렇게 곳곳에 그대로 있는, 정확히는 미동하지 않은 채 오래 있었던 것들을 분류하여 버리기 시작했다. 방을 치우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책상 위를 깨끗하게 해서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생산적인 일을 자발적으로 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공부가 잘 안되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는 독서실이나, 근처 도서관을 가는 것과 유사하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무언가 또 다른 것을 하고 싶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다. 제일 중요한 것은 안 쓰는 물건들은 물론이고 쓸 것을 예상하고 놔뒀지만 아직도 쓰지 못한 것들도 버려야 한다는 것.
마음만은 단순하고 간결함을 추구해서 싹 비우는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 싶지만 태생이 그렇지 않다 보니 어려움에 자주 직면한다. 버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도 조금씩 노력하고 있다.
방 청소를 하면서 비움으로 인해 왠지 모를 희망이 채워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앞으로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지쳐서 침대에 바로 눕고 싶더라도 책을 한 페이지라도 읽거나, 드로잉 한 획이라도 할 수 있도록 책상에 앉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피곤함을 핑계로 멈춰져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다시 천천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이렇게 '비움'을 하면서 반대로 '채움'이 일어난다는 것에 새삼 신기했다.
당연한 말일 수 있지만 사뭇 다르게 다가온 이유는 '드로잉', '여행'에도 접목이 되서다. 우선 드로잉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가끔 근심, 걱정, 스트레스를 안고 있을 때 드로잉 할 때가 있다. 하얗던 종이는 연필과 펜으로 서서히 채워진다. 반면에 갖고 있었던 좋지 않은 생각들은 서서히 비워져 간다. 에어팟 프로의 노이즈 캔슬링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데 적절한 비유가 아닐까 싶다. 세상 나 혼자 살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게 바로 드로잉에 집중했을 때다. 걱정이 비워진다는 것이긴 하지만 아무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봐서는 소멸의 의미도 담고 있다.
직장인들에게 여행은 보통 주말이나 휴가를 사용해서 떠나는 것이다. 일하면서 쏟았던 에너지를 채워야 하기 때문에 쉬어야 한다고 대부분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여행을 하면서 에너지가 감소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채워지는 에너지는 또 다르다. 똑같은 일상 속에서도 오는 권태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일상을 벗어나는 것이고 이내 곧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다. 꼭 거창하게 어느 나라를 간다거나, 특정 지역을 가야 하는 것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집 근처로 음악 들으며 걷는 것 자체도 여행이다. 주중에 오랜 시간 동안 몸담았던 곳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가까워진다. 어딘가로 떠나면서 육체적인 노동이 더해져 힘이 비워질 수 있지만 그 외에 정신적으로 다가올 긍정적인 기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청소와 드로잉, 여행은 비움과 채움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어쩌면 당연한 소리지만 의미를 곱씹어 천천히 생각해보면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준다.
하루 만에 청소가 되지 않았다. 버리기에 집중을 했으나 다시금 '이거 나중에 꼭 쓰일 일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해 많은 진전이 없었다. 시간을 더 두고 천천히 비워나가야지. 비우면서 또 다른 무언가를 채워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