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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혼 Jul 02. 2019

교실 이야기

액체 괴물


 오늘도 미세먼지 덕분에 아파트 놀이터에서 보이던 소수의 아이들이 자취를 감췄다. 덩달아 놀이터에서는 모래도 함께 사라졌다. 요즘 놀이터에는 중금속에 오염된 모래 대신 친환경 바닥재가 깔린 곳이 많다. 심지어 바닥재도 발암 물질이 발견되어 통째로 놀이터가 폐쇄된 곳도 있다. 시대가 변한 탓도 있겠지만 이러한 세태는 슬프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


 놀이터의 변화와 더불어 오래전부터 동요로 전해 내려온 모래 놀이도 추억 속으로 밀려났다. 소근육 발달 및 공간 지각력 향상 등 많은 교육적 가치를 가지는 모래로 하는 오감놀이는 요즘 아이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들다. 흔하디 흔한 모래는 불결한 물체가 되었다. 대신에 깨끗한 실내에서 식재료들로 오감 놀이를 하는 게 유행이고 아이들은 바닷가에 가서야 모래를 만질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시대다.


 그러다 보니 실내에서 하는 오감놀이를 할 여유가 없거나 바닷가에 갈 기회가 없는 아이들은 심심한 손을 가만 둘 수 없어 납작한 기계를 계속 터치해댄다. 놀이터와 모래를 빼앗긴 아이들은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 갇혀 성냥갑 같은 기계에서 나오는 공기를 마시며 성냥갑 같은 기계를 손에 들고 성냥갑처럼 움직이지 않고 앉아만 있다.

 하지만 핸드폰만이 유일한 놀이 수단인 것 같은 아이들에게 모래 놀이와 유사한 것이 등장했으니 그것이 바로 '액체 괴물'이다. 초등학교 교문 앞에 있는 문구점에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으며 유사품으로 슬라임, 액체 소녀 등이 있고 오백 원에서 천 원 사이의 가격에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인기가 폭발적이어서 액체괴물을 한 번도 안 사본 학생이 없을 정도다. 아이들은 등하교를 하며 문구점에 들러 신상 액체 괴물을 고르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 원통형 괴물은 대한민국 지방 소도시 외곽의 초등학교까지 깊숙이 침투하여 왕성히 번식 중이다.


 대체 몸에도 안 좋고 촉감도 불길한 반고체 물질로 무엇을 하나 한참 동안 아이들을 지켜본 적이 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우리 세대의 모래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액체괴물이라는 점이었다. 아이들은 인형 하나만 가지고 잘 논다. 가상의 이야기를 꾸며내고 없는 생기도 불어넣으며 풍부한 상상력을 기른다.


 모래놀이는 형태가 정해진 장난감과는 다른 유형의 놀이가 가능하다. 더 큰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모래 더미에서 집을 짓고 성을 쌓으며 상상력을 다져간다. 아이들에겐 장난감도 필요하지만 이러한 놀이도 필요하며 자연스러운 과정인데 모래 같은 것이 없으니 액체괴물에 열광하는 것이다.

 같은 사례로 마인크래프트도 꾸준한 인기를 유지한다. 아무 것도 없는 공간에서 아이들은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액체괴물도 그렇다. 어른들이 보기엔 옷에 묻으면 지워지지도 않는 쓰레기 같지만 아이들에겐 상상력을 기를 수 있는 무한의 연금술이다.


 액체괴물만 잠자코 가지고 노는 건 제대로 놀 줄 모르는 아이고 곧 흥미가 식을 것이다. 하지만 노는 법을 배우고 나면 다르다. 물, 로션, 물감, 샴푸, 밀가루, 쉐이빙 폼 등 사람이 만질 수 있는 모든 물질을 액체괴물에 쏟아붓는다. 옷에 튀기고 몸에 달라붙어도 개의치 않고 정신없이 만져댄다.


 무엇을 섞느냐에 따라 색도 다양하게 변하고 질감도 다양하게 변하니 아이들은 이번엔 무엇을 넣을까 생각만 해도 신난다. 액체괴물을 하나만 살 수 없는 이유다. 하나 둘 사다 보니 열 개가 되고 스무 개가 된다. 부모들은 옷에 묻으면 지워지지도 않고 성분을 알 수 없는 요상한 것들을 아이 손에 묻히자니 불안해서 사지 못하게 하고 갖다 버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 번 맛을 본 아이들은 그 재미에 푹 빠져 끊을 수가 없다. 우리 반 아이들도 마찬가지란다. 교실에서 가지고 논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더니 가만히 책상에서 앉아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쉴 새 없이 반죽을 해댔다. 교실 바닥에 흘러넘치고 책상에 들러붙는 사태가 난 후에야 나도 다른 어른들처럼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아이들은 시무룩한 표정을 한 채로 옷과 책상에 달라붙은 액체괴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한낮에 땡볕에서 땀을 흘리며 동네 아이들과 모래 놀이터에서 중요한 토목 공사를 마친 뒤 당당히 복귀하니 흙먼지가 잔뜩 묻어서 어머니에게 혼나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른들의 입장에선 골칫덩이 취급을 받고 판매 금지 품목에 넣어야 할 액체괴물은 너무나도 당연한 놀이를 빼앗겨버린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액체 친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교실에서는 안 된다.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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