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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혼 Jul 18. 2019

교실 이야기

선생의 존재감

 텔레비전을 보다가 좋은 선생님 캠페인이라는 것을 봤다. 흔히들 생각할 수 있는 뻔한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온화한 미소로 웃는 선생님과 존경 어린 눈빛의 학생들은 찾아보기 힘든 현실을 꾸며내고 있었다.


  언제부터 변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사제 관계는 날이 갈수록 형식적인 관계가 되어 간다. 각박한 현대 사회에 정다운 인간관계가 사라지고 있다고 하나 진득한 사제관계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은 씁쓸한 기분이 들게 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선생님은 어떤 존재일까. 정확히 선생님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입장을 상상해본다면 선생이 중요치 않게 보이는 타당한 이유가 여럿 보인다. 어쩌면 바쁜 부모님보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은데도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은 이유가 있다.


 한 학급에 스무 명이라고 하면 아침부터 매일 6시간을 같이 있어도 학생들에게 할당된 시간은 1인당 18분, 그것도 선생님이 1초도 쉬지 않고 학생과 1:1로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고 가정했을 때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수업시간 등 이것저것 다 빼면 한 마디를 개별적으로 나누지 못하는 날도 허다하다. 강의식 수업을 일삼는 선생 아래 있는 학생들은 더 대화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학생들을 유형별로 살펴봐도 상황이 좋지 않다. 모범생은 모범생대로 어색하다. 모나지 않고 하라는 대로만 하다 보니 온통 주의는 다른 애들이 끌고 다녀서 잘한다는 칭찬이라도 꾸준히 받으면 다행이다. 규칙을 잘 어기는 학생도 학생대로 부정적인 추억이 쌓일 확률이 높다. 자상하게 부드럽게 행동을 고쳐줄 선생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학생 수도 많고 더 교육적이지 못한 교육을 했지만 끈끈한 사제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기회는 존재했었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선생 또는 매체가 없어서 학교의 선생은 학생들에게 유일한 선생이었던 이유가 가장 크지 않을까 한다. (요즘은 힘주어 말해봤자 씨알도 안 먹힌다.)


 지금은 학교 밖만 나서면 선생들로 가득하다. 방과후 교문 근처엔 환하게 웃으며 포옹하거나 손을 잡아 학생들을 반겨주는 선생들이 있다. 그들은 관장, 쌤, 언니, 등으로 불리며 아이들에게 긍정적이고 즐거운 경험으로 채워주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학교의 선생과 비교했을 때 아이들이 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아이들은 조금만 남긴다 하면 학원에 가지 못해 안달 난다.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아이들의 삶에 사교육 선생의 위치는 학교의 선생보다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중요도는 학생들의 폰에 담긴 연락처에서도 드러난다.


 학교 선생은 000 선생님, 0학년 선생님, 0-0 선생님 등으로 명명되고 몇 년 동안 방과후를 책임진 정다운 사교육자들은 이모티콘이 붙거나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 학급 내에서 현재 담임 선생님을 ‘우리 선생님’이라고 저장한 학생이 많은 경우, 학급 운영을 아주 잘하는 선생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그렇다 해도 다음 해엔 '우리'라는 명칭이 사라질 것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캡틴 같은 영향력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공교육에 몸담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사제 관계가 지속된다고 생각하면 슬프다. 학교도 나름대로 옛 권위를 되찾기 위해  이리저리 발버둥 쳐보지만 사교육과 매체에 압도되어 힘을 못 쓰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열심히 제 본분을 다해 보지만 쭉정이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매년 바뀌는 아이들을 맞이하고 정신없이 1년을 보내고 넘겨 보내다 보면 나란 일개 선생은 컨베이어 벨트의 사소한 공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나는 학생들의 인생에 꼭 있어야만 하는 선생이었나? 자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의기소침해지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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