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 가뭄살이

기쁜 일과 감사한 일

by 아직


아파트에서 방송이 울렸다.

"...물이 공급되지 않습니다. 재난 상황입니다..."


9월 9일 화요일 아침

평소처럼 출근 준비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가서 수전을 올렸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물이 나오지 않았다. 단수가 시작되었다.

지난 주말에 관리실에서 무료로 받은 '2리터x6개'의 물이 생각났다. 생수의 뚜껑을 열어 한 컵을 채우고 양치를 했다. 그리고 세면대에 물을 받아서 세수를 했다. 그리고 머리를 감았다. 머리가 촉촉이 젖을 만큼만 물을 천천히 머리에 붓고, 물이 세면대에 떨어지지 않고 머리카락에 모두 흡수될 수 있도록 손을 긴급하고 분주히 움직이면서 머리카락 곳곳을 적셨다. 머리카락을 벗어나 밑으로 흐르는 물은 몇 방울 되지 않았다. 샴푸도 적정량만 묻히기 위해 펌프 입력을 조절했다. 머리 감기에 충분하면서도 지나친 거품으로 필요 이상의 물을 쓰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아끼고 아껴서 한 통 반, 약 3리터의 물을 사용하여 출근 준비를 마쳤다.

첫날이어서 그랬을까. 상당히 불편한 경험이었지만 기분이 불쾌하거나 불안하거나 하지는 않고, 참 별일이 다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이런 경험도 하네, 하는 생각이었다.


학교에서는 먼저 오신 선생님들이 단수를 화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대부분 시간대를 나누어 단수와 급수를 하는 제한급수를 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그러한 제한 급수가 시행되지는 않았다. 오래된 아파트 여서 시간별 제한급수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물이 있으면 나오고, 물이 나오지 않으면 외부에서 물보충을 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화장실 수전을 들어 올렸다. 물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샤워를 했다. 저녁 6시였다. 물의 감각이 이렇게 좋았던가. 샤워 후의 개운함도 평소보다 더했다. 씻는 동안, 그리고 씻고 나온 후 기분이 매우 좋았다.


9월 10일 아침

오늘도 생수를 열어 머리를 감은 후 출근했다. 오늘은 2리터로 충분했다. 어제보다 1리터나 줄였다. 벌써 노하우가 생기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퇴근 후였다. 아파트의 물 보충이 내일 새벽에 이루어진다고 이미 안내가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물이 안 나오는 셈이었다. 퇴근을 할 무렵, 같은 테니스 동호회 형님이 사설 테니스 코트를 예약했으니 같이 치자고 했다. 그 말보다 눈에 띈 것은 그곳에 샤워장이 있고 물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운동을 하고 저녁 샤워를 해결했다.


9월 11일 목요일

오늘 새벽에 물을 보충했는지 아침부터 물이 나왔다. 화장실에서는 어제 하루의 단수만에 청결도가 낮은 공중화장실의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했다. 변기물을 내리면서 가볍게 청소를 했다. 평소처럼 양칫물을 받아 입을 헹구고, 평소랑은 다르게 세면대에 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샤워기의 수입을 평소보다 낮게 조절하며 절약형 모드로 아침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며칠 방치된 냄비와 그릇과 수저를 아주 빠르게 씻어 냈다. 평소보다 수압은 낮추고, 손을 아주 빠르고 분주히 움직여 씻어내다 보니 더 깨끗하게 빡빡 닦이는 기분이 들었다. 깨끗이 정돈된 싱크대를 보는 게 오랜만인 것 같았다. 개운한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학교에서는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학교는 강릉이 아니기 때문이다. 콸콸 쏟아지는 물의 수압, 거기에 단수가 걱정을 덜어낸 마음이 더해져 기분이 좋아졌다. 퇴근할 땐 미리 챙겨 온 자주색 김치통 두 통에 물을 가득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기분이 좋았다.


물이 나오는 것에, 물을 확보하는 것에 기쁘다니... 항상 있던 것들이 없어지거나 부족할 때 그 소중함을 느끼곤 한다. 이번에도 그렇게 일상의 소중함과 기쁨을 느끼면서 기쁜 일과 감사한 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기쁜 일과 감사한 일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노란색 월급봉투를 가져오신 날이면 나는 매우 신이 나서 냉장고로 뛰어갔다. 아버지의 월급날은 치킨을 시켜 먹는 날이었고, 냉장고 위에는 가게들의 전화번호부가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인스턴트를 못 먹게 하시던 엄마가 일요일 아침에 라면을 끓여 주시면 그렇게 기뻤다. 그러나 언제든지 치킨이나 라면을 먹을 수 있는 지금은 그때만큼 기쁘지 않다.


항상 있는 일들은 기쁘지는 않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수전을 올렸을 때 깨끗한 물이 나오는 건 감사한 일이다. 굶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는 것, 편안히 잘 곳이 있는 것, 아픈 곳 없이 건강한 것,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것,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 큰 부족함 없이 지내는 것, 부모님이 건강히 살아 계신 것... 모두 감사한 일이다.


단수가 되었다가 물이 나오는 일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친구를 만나는 것, 오랜만에 친구와 연락이 닿는 것, 다리가 아파서 걷지 못하다가 걷게 되는 것,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는 것... 평소와 다르게 일어나는 좋은 일들은 모두 기쁜 일이다.


기쁜 일은 또 감사한 일이 된다. 모든 기쁜 일은 감사한 일이며, 기쁨은 감사로 남는다. 내 주변에는, 내 안에는 어떤 감사한 일들이 있는지... 셀 수 없이 많다. 기쁨은 축제와 같다. 마음이 들뜨고 반짝반짝 빛난다. 감사는 축제를 시작하기 전에도, 축제 진행하는 중에도 그리고, 축제가 끝난 뒤에도 남아 있다. 들뜬 기쁨도 곧 내려와 감사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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