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선배가 되었다.
난 선배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내 인생에 선배는 항상 어려운 존재였고 굳이 그들과 사적인 관계를 만들려 한 것 같지 않다. 그렇게 무의식적이지만 난 선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일을 다닌 지 꽤 시간이 흐르더니 나에게도 후배가 생겼다. 처음 후배가 생기면 내 일이 조금 줄어들고 귀찮은 일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처음이니 실수가 잦았고 하나를 위해 열을 알려줘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배우겠다는 열의가 있었다. 선배들에게 없는 뜨거운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뜨거웠다. 어쩌면 그 뜨거움의 잔열이 아직까지 나를 지탱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우린 뜨거웠다. 열정이 넘쳤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머리 꼭대기까지 넘쳐났다. 걷는 것보단 뛰는 것이, 가벼운 것보단 무거운 것이 편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뜨거움은 생각보다 더 쉽게 사그라들었다.
뛰는 것 보단 걷는 것이, 무거운 것보단 가벼운 것이 편해질 때쯤, 뜨거운 후배가 생겼다. 어쩌다 선배가 되었다.
좋은 선배가 되고 싶었다. 그들의 뜨거움을 더 뜨겁게는 못하겠지만 더디게 식히고 싶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식어빠진 그들과는 달랐으면 했다. 아니, 결국 같겠지만 조금이라도 보듬어주고 싶었다.
좋은 선배는 메모장에 있었다.
나에겐 조금 특별한 습관이 있다. 사사로운 불만을 메모장에 적어놓는 것 말이다.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저 불만을 쓰는 과정에서 불만이 타당한지 판단할 수 있다. 또 위로가 된다. 불만 메모 몇 가지를 가져왔다.
무시하지 말자, 나 혼자 잘났다고 떠들지 말자 기죽이지 말자 누군가에게 칭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19.08.19
사람의 능력을 보고 판단하지 말자 가능성을 보고 판단하자 작은 것을 보고 큰 그림을 보도록 하자
누구나 틈은 있다. 19.09.11
열심히 했는데 욕먹는 게 가장 미련한 짓이라 했다. 근데 열심히 했는데 욕하는 것도 힘 빠지게 하는 일이다. 잘못한 것을 지적하는 비판과 꾸중은 이해하되 무차별적이며 힘 빠지게 만드는 비판은 경계하자. 19.10.16
개구리는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 하지만 기록하면 된다.
내가 이래서 기록을 좋아한다. 지금 고민한 부분의 답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기록이 주는 뜻밖의 선물이다. 위 메모들을 적을 당시에는 불평과 불만을 적었는데 좋은 선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니 저 글들이 또 새롭게 느껴진다. 내가 느꼈던 불합리와 불만족, 뜨겁고 날카로웠던 '나'에게 해주고 싶은 행동을 후배에게 해주면 될 일이었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이어도 좋다. 후배들은 모든 문제를 척척 해결하는 해결사를 원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 문제를 고민하고 공감해줄 먼저 뜨거웠던 사람이 필요할 뿐이니 말이다.
우리는 미래의 이상적 기대 보단 지금의 구체적인 사실이 누군가에게 더 가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누구나 다 뜨거웠고 반드시 그 뜨거움은 식는다. 하지만 그 뜨거움을 기억하는 자에겐 새로운 뜨거움이 찾아온다. 이것이 좋은 선배의 조건이다.
당신이 지금 뜨겁다면 그 뜨거움을 반드시 기억해주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뜨거웠던 그때를 기억하며 적어놓은 좋은 선배의 조건을 적고 글을 마치려 한다.
가르 치려하지 말자
가리키지 말자
비교하지 말자
기준은 내가 아니다.
불쌍히 여기지 말자
먼저 하자
시키지 말자
왜곡 없는 객관적 사실만 전달하자
감정을 싣지 말자
술자리에선 솔직해지자
사람답게 보이자
잘하려 하지 말자
같은 길에 조력자라 생각하자
나보다 뛰어남을 인정하자
시샘하지 말자
부족함을 감추려 하지 말자 더 부족해 보인다
솔직해지자
냉정함을 유지하자
그들의 입장이 되려 하지 말자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있게 하자
‘나’ 나 잘하자
사진은 Pixabay로부터 입수된 Daniel Kirsch님의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