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하는 노동의 형태는 어떤가?
나 땐 말이야.
꼰대들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 노동과 현대 노동을 비교한다. 그리고 앞으로 노동이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난 주름살을 존경한다. 의도 있는 삶의 흔적을 공경한다. 가끔 한국 현대사를 보게 되는데, 역사라고 하면 무겁다. 그냥 우리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다. 4.19 혁명, 5.16 군사정변, 민주화 운동, IMF 외환위기, 등 지금은 실감 나지 않는 일 들이다. 매체를 통해 볼 수밖에 없지만 객관적 사실이 있는 그대로의 역사다. 발전 과도기에 있는 국가가 겪을 수 있는 성장통이다.
그들에게 노동은 어떤 의미였을까? 지금 한국의 위상은 역사에 소개된 몇몇의 우두머리가 세운 것이 아니다. 일상에 놓여있던 다수의 노동자들이 우리나라를 세웠다. 열악한 환경, 낮은 임금, 공동체를 위한 투쟁. 그들에게 노동은 더 나은 것을 위한 양보였다.
하지만 분명함은 있었다. 회사에 입사해 더 나은 것을 위해 양보하다 보면 그에 따른 보상이 있었다. 대부분의 조직은 성실히 꾸준히 양보하는 다수의 노동자가 필요했다. 능력 있고 예민한 노동자는 소수만 있으면 됐다. 난 이런 노동을 기존 노동이라고 부르겠다.
요즘 애들은 의지가 없어.
더 나은 것을 위해 양보하는 것이 익숙해진 기존노동은 결코 쉽지 않다. 일명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필요하고 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것은 한 회사에서 오래 근무해야 했던 기존노동의 특징이다. 꾸준히 길게 일해야 했다. 근로자가 얼마만큼 이 회사의 이익에 기여했는지 보단 성실한 사람인지가 더 중요했다.
지금의 노동이 더 좋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기존노동과 지금의 노동은 분리해 생각해야 한다. 기존노동에 비해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노동이기에 난 이런 노동을 젊은 노동이라 하겠다.
기존노동과 젊은노동을 구분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환경이다. 즉, 살고 있는 세상이 변했다. 한국사회는 이제 선진화됐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성장했고 그에 따른 보상은 편함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다. 바로 불균형이다.
기존노동을 추구하던 선배들이 종종 젊은노동을 지적하는 이유 중 하나가 편함이다. 하지만 우리가 염두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다. 편함은 우리에게 주어진 보상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균형이다. 성장의 가속화로 잠깐 미뤄두었던 균형화가 젊은노동의 핵심이다.
정리하자면 기존노동이 분명한 보상을 담보한 희생이라면 젊은노동은 편함을 전제한 균형이다.
그렇다면 균형은 어떻게 우리의 노동이 될까? 균형을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고른 상태.’이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살펴보면 IMF 외환위기 이후 부의 양극화가 심화됐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들은 더 부유해지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에 따라 노동의 양극화도 진행됐다. 역할에 따라 노동의 강도가 달라졌고 노동의 강도와 임금이 비례되지 않았다. 즉 우리의 노동은 불공정해졌다.
젊은노동의 핵심은 균형이다. 그들은 공정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합리적이어야 하고 정의로운 상태여야 한다. 상식과 양심에 어긋나는 노동은 하지 않는다.
회사를 위한 야근, 과업, 희생은 젊은노동에겐 비합리적이다. 다만 그에 상응하는 가치가 보상되면 합리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행동하지 않는다. 기존노동이 익숙한 우리 사회는 젊은노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기적이라 생각할 수 있고 혹자는 한심하다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젊은노동이 추구하는 균형이고 공정이다.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란다. 젊은노동은 무조건적인 편함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편할 수 있는 것은 편하자는 것이다. 즉 합리적이다. 또 균형과 공정이 담보된다면 젊은 노동은 언제라도 행동한다. 아니 생각보다 더 한다.
기존노동에 익숙한 사회권력은 젊은노동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야 한다. 행동할 수 있는 실제적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우리가 해결할 문제는 차별적 성장이 아닌 합리적 균형이고 공정이 추구되는 직장생활이다.
이것이 젊은노동이다.